산업 기업

회장 취임후 매출 1,150배↑...'글로벌 LG' 도약 이끈 巨木

[구자경 LG 명예회장 별세]

부친 요청에 1950년 교편 놓고

본격적으로 기업인의 길 걸어

십수년 공장생활하며 현장 수련

창업·성장 주도 1.5세대 경영인

퇴임후엔 버섯연구 등 취미활동

은퇴한 경영자의 모범 보여줘

LG화학 부산 연지동 공장 앞에서 구인회(왼쪽부터) 창업회장, 구평회 창업고문, 구자경 명예회장, 구자두 LB인베스트먼트 회장이 포즈를 취하고 있다. /사진제공=LGLG화학 부산 연지동 공장 앞에서 구인회(왼쪽부터) 창업회장, 구평회 창업고문, 구자경 명예회장, 구자두 LB인베스트먼트 회장이 포즈를 취하고 있다. /사진제공=LG



지난 14일 숙환으로 별세한 구자경 LG그룹 명예회장은 LG를 지금과 같은 글로벌 기업으로 성장시킨 경영계의 거목이다.

회장으로 취임하기 전까지 20년간 생산현장을 지켰고 지난 1970년 LG그룹 2대 회장으로 취임한 뒤 25년간 ‘도전과 혁신’을 주도하며 LG의 비약적인 발전을 이뤄냈다.





구 명예회장은 LG그룹 창업 초기이던 1950년 스물다섯의 나이에 모기업인 락희화학공업주식회사에 입사해 명예회장으로 경영 일선에서 은퇴할 때까지 45년간 LG에 몸담았다. 특히 구 명예회장이 25년간 회장으로 있는 동안 LG그룹은 매출 260억원에서 30조원대로 약 1,150배 성장했고 임직원 수도 2만명에서 10만명으로 증가했다. 주력사업인 화학과 전자 부문은 부품·소재 사업까지 영역을 확대해 수직계열화를 이루며 지금과 같은 LG의 모습을 갖출 수 있는 기틀도 마련했다.

구자경(오른쪽 세번째) LG그룹 명예회장이 미국 현지생산법인에서 생산된 제1호 컬러TV 제품을 살펴보고 있다. /사진제공=LG구자경(오른쪽 세번째) LG그룹 명예회장이 미국 현지생산법인에서 생산된 제1호 컬러TV 제품을 살펴보고 있다. /사진제공=LG


구 명예회장은 구인회 LG 창업주의 장남으로 1925년 경남 진주시에서 태어났다. 구 명예회장이 진주사범학교를 마치고 교사로 근무하던 1947년 부친인 구인회 창업회장의 부름을 받는다. 구 창업회장은 당시 LG의 모기업인 락희화학공업사(현 LG화학)를 설립해 럭키크림 화장품 사업을 시작했는데 사업이 번창하며 일손이 모자라자 아들인 구 명예회장에게 도움을 청한 것이다. 낮에는 교사로, 밤에는 부친의 사업을 도우며 지내던 구 명예회장은 아예 회사에 들어와 사업을 도우라는 부친의 요청에 1950년 교편을 놓고 본격적으로 기업인의 길을 걷게 됐다. ‘이사’라는 직함에도 불구하고 가마솥에 원료를 붓고 불을 지피는 등 럭키크림 생산을 직접 담당하면서 현장에서 경험을 쌓았다. 이후 십수년 공장생활을 하며 ‘공장 지킴이’로 불릴 만큼 현장 수련을 오래 했다. 부친인 구 창업회장에게 지인들이 “장남에게 너무한 것 아니냐”고 할 정도였으나 창업회장은 “고생을 모르는 사람은 칼날 없는 칼이나 다를 게 없다”며 현장 수업을 고집했다. 이처럼 구 명예회장은 부친의 창업 초기부터 생산 현장을 지켜 여느 2세 경영인과 달리 창업과 성장을 함께 주도한 1.5세대 경영인으로 평가받는다.

구자경(왼쪽) LG그룹 명예회장이 1995년 회장 이취임식에서 고 구본무 회장에게 LG 깃발을 전달하고 있다.  /사진제공=LG구자경(왼쪽) LG그룹 명예회장이 1995년 회장 이취임식에서 고 구본무 회장에게 LG 깃발을 전달하고 있다. /사진제공=LG


1969년 구 창업회장이 별세하면서 구 명예회장은 1970년 LG그룹 2대 회장에 올랐다. 구 명예회장은 회장 자리에 오른 뒤 두 차례의 석유파동과 안팎의 어려운 경영환경을 극복하고 화학·전자 산업 강국을 위한 도전과 선진기업 경영을 위한 혁신의 시대를 펼쳤다. 특히 ‘기술입국’의 일념으로 화학과 전자 분야 연구개발(R&D)에 열정을 쏟아 70여개의 연구소를 설립했으며 수많은 국내 최초 기술과 제품을 개발해 LG의 도약을 이끌었다.

아울러 그는 과감한 경영혁신을 추진해 자율경영체제 확립, 고객가치 경영도입 등 기업 경영의 선진화를 주도했다. 특히 계열사 사장들이 ‘자율과 책임경영’을 할 수 있도록 권한을 위임하는 LG ‘컨센서스 문화’의 싹을 틔웠다는 평가를 받는다. 또 물건을 만들면 팔리는 시절이었음에도 ‘고객 중심 경영’을 표방했는데 이 같은 구 명예회장의 혁신적 경영활동은 당시 재계의 큰 반향을 일으켰다.


구 명예회장은 1970년대에 잇따른 기업공개(IPO)로 우리나라 초기 자본시장에 활력을 불어넣고 투명경영을 선도하기도 했다. 당시만 해도 IPO를 기업을 팔아넘기는 것으로 오해해 우려하는 분위기가 강했고 일부 임원들은 IPO를 강력히 반대했다. 그럼에도 구 명예회장은 IPO가 앞으로 거스를 수 없는 큰 흐름이 될 것이라며 믿음을 꺾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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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0년 2월 그룹의 모체인 락희화학이 민간기업으로서는 국내 최초로 IPO를 통해 증권거래소에 상장했고 곧이어 전자 업계 최초로 금성사가 IPO를 하면서 주력 기업을 모두 공개한 한국 최초의 그룹이 됐다. 이후 금성통신(1974년), 반도상사·금성전기(1976년), 금성계전(1978년) 등 10년간 10개 계열사의 IPO를 단행해 안정적인 자금조달을 통한 도약의 기반을 마련했다.

70세이던 1995년 장남인 고(故) 구본무 회장에게 그룹을 넘겨준 뒤에는 철저하게 평범한 자연인으로 살았다. ‘한번 믿으면 모두 맡겨라’라는 구인회 창업회장의 말에 따라 은퇴한 후에는 후진들의 영역을 확실히 지켜줬다. 대신 구 명예회장은 충남 천안시 성환에 위치한 연암대 농장에 머물며 버섯 연구를 비롯해 자연과 어우러진 취미활동에 열성을 쏟았다.

구 명예회장은 퇴임 후 “내가 가업을 잇지 않았다면 교직에서 정년을 맞은 후 지금쯤 반듯한 농장주가 돼 있지 않았을까”하고 말하기도 했다.

재계의 한 관계자는 “국내 재계를 대표하는 기업인이었지만 은퇴 후 일체의 허례허식 없이 자연인으로서 간소한 삶을 즐긴 구 명예회장은 은퇴한 경영자의 모범 그 자체였다”고 말했다.


이재용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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