각국에서 모인 전문가들과 기업인들이 경제 문제를 논의하는 세계경제포럼(WEF) 연차총회(다보스포럼)가 한 달 앞으로 다가온 가운데 주요국 정상들의 불참으로 이 자리가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성과 과시용 무대로 전락할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온다. 시진핑 중국 국가 주석의 불참으로 미중 정상이 다보스포럼에서 만나 1단계 무역합의에 서명할 가능성이 희박해진 상황에서 트럼프 대통령은 이 자리를 ‘아메리카 퍼스트’ 과시 무대로 활용하려 하고 있기 때문이다.
20일(현지시간) 블룸버그통신은 복수의 소식통을 인용해 시 주석이 내년 1월 스위스 다보스포럼에 참석하지 않을 계획이라고 보도했다. 이 소식통은 중국은 대신 류허 부총리를 워싱턴DC에 보내 미중 1단계 무역합의문에 서명할 계획이라고 전했다. 시 주석은 지난 2017년에는 포럼에 참석했다.
반면 트럼프 대통령은 다보스포럼에 참석할 예정이라고 블룸버그가 지난 17일 미 행정부 관계자들을 인용해 보도했다. 이 매체는 스티븐 므누신 재무장관도 포럼에 동행한다고 전했다.
매년 1~2월 다보스에서 열리는 다보스포럼은 국제민간회의로 전 세계 저명한 기업인, 경제학자, 정치인 등이 참여한다. 1971년 시작됐으며 내년에는 1월 21∼24일 열린다. 이번 주제는 ‘화합하고 지속가능한 세상을 위한 이해 당사자들’로 정해졌다. 지속가능한 개발과 더 많은 사람에게 경제적 번영을 나누는 목표가 양립 가능하다는 점을 알리겠다는 취지다. 내년 행사 때는 미중 정상이 참석해 미중 1단계 무역합의문에 서명할 수 있다는 관측이 나와 눈길을 끌었다. 하지만 시 주석의 불참으로 서명식은 불발됐다.
블룸버그에 따르면 보리스 존슨 영국 총리도 이번 다보스포럼에 참석하지 않는다. 그는 장관들에게도 포럼에 가지 말라고 지시한 것으로 전해졌다. 그동안 영국 총리들과 선임 장관들은 다보스 포럼에 가서 글로벌 저명인사들과 인맥을 쌓는 데 열심이었다. 존슨 총리도 앞서 런던 시장으로 재직할 때 다보스 포럼에 최소 두 차례 참석해 런던 투자 유치에 힘쓴 바 있다. 그는 2013년 BBC방송에 다보스 포럼에 대해 “기라성 같은 사람들이 모인 자리”라고 말한 바 있다.
로이터통신에 따르면 존슨 총리는 지난 17일 총선 승리 후 가진 첫 내각회의에서 이같이 밝히면서 자신은 정부를 ‘인민의 정부’로 운영하겠다고 말했다. 한 정부 소식통은 다보스 포럼을 겨냥해 “우리의 초점은 인민을 위해 공약을 집행하는 것에 있지 억만장자들과 샴페인을 마시는 데 있지 않다”고 전했다.
존슨 총리가 다보스 포럼 불참을 지시한 이유는 지구촌 명사들이 모이는 호화판 포럼에 가서 샴페인을 홀짝홀짝 마시기보다 총선 공약 이행에 힘쓰라는 취지에서다. 그는 보수당 출신으로 마거릿 대처 전 총리가 1987년 압승을 거둔 이후 처음으로 이달 12일 보수당의 대승을 이끌었다. 이번 압승의 배경은 보수당이 노동자들의 몰표를 받았다는 데 있다. 보수당은 주로 노동자들이 많은 영국 북부지역에서 노동당을 누르고 이번 총선에서 과반을 80여석이나 뛰어넘는 압승을 거뒀다. 그는 최근 보수당의 승리를 ‘지각 변동’에 비유하면서 “유권자들이 당정을 더 좋게 바꿔준 만큼 우리는 이제 우리나라를 개선함으로써 그들의 신임에 보답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의회 연설에서도 의회가 “인민의 의회”가 돼야 한다면서 브렉시트(영국의 유럽연합 탈퇴, Brexit) 완수 의지를 재천명했다.
현지 언론들은 존슨 총리의 이번 다보스 포럼 불참 지시가 트럼프 대통령의 과거 행동과 흡사하다고 지적했다. 트럼프 대통령은 2017년 취임 직후 고위급 미국 관리들이 다보스 포럼에 참석하는 것을 금지했다. 당시 트럼프 대통령직 인수위원회는 기자들에게 억만장자가 모인 알프스 산록의 사교 모임에 참석하는 것은 트럼프 대통령의 대중주의적 움직임에 대한 배신이 될 것이라고 설명한 바 있다.
이에 따라 이번 다보스포럼은 트럼프 대통령이 미국의 경제와 자신의 정치적 업적을 과시하는 무대로 전락할 위기에 처했다. 그는 2018년 다보스포럼에 참석해 ‘미국 우선주의’(America first) 기조를 역설한 바 있다. 그렇지만 지난 1월에는 연방정부의 ‘일시적 업무정지’(셧다운) 사태 속에 참석 일정을 취소했다. 블룸버그통신은 “내년 재선에 도전한 트럼프 대통령으로서는 이번 다보스포럼이 자신의 경제적 성과를 부각하는 기회가 될 것”이라고 분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