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4일 별세한 구자경 LG그룹 명예회장의 경영 행보와 삶은 경영계에 큰 울림을 던졌다.
구 명예회장은 ‘기술입국’의 일념 아래 우리나라가 전자·화학 산업 강국으로 도약하는 기틀을 다졌다는 평가를 받는다. 그가 회장으로 있는 동안 LG는 글로벌 기업으로 우뚝 섰다. 정부의 노골적인 반기업 정책과 사회 전반의 반기업 정서 속에 기업인들의 ‘야성적 충동’이 점차 사그라드는 시점에 그의 발자취는 깊은 여운을 남긴다.
특히 “혁신은 내 평생의 숙원”이라고 말하던 구 명예회장이 받은 혹독한 경영수업과 생전에 보여준 아름다운 은퇴는 현재 국내 기업의 총수 일가에 시사하는 바가 크다.
구 명예회장은 45세의 나이로 LG그룹의 2대 회장에 취임하기 전까지 공장에서 20년간 생산현장을 지켰다. ‘이사’ 직함을 달고 가마솥에 원료를 부어 불을 지폈고 슬리핑백을 뒤집어쓴 채 공장에서 숙직하기 일쑤였다. 당시 구 명예회장은 설비 점검과 기계 발주 등 공장 신·증축을 직접 해내며 화학·기계·전기 등에 대한 지식과 경험을 습득했다고 한다. 이는 뒷날 그가 화학과 전자 사업을 발전시키는 데 큰 도움이 됐다. 구 명예회장의 부친인 구인회 LG 창업주는 “고생을 모르는 사람은 칼날 없는 칼이나 다를 게 없다”며 아들의 오랜 현장 수업을 고집했다.
이는 현재 일반적으로 기획 부서나 해외 지사에 입사하며 출발해 몇 년 만에 임원으로 초고속 승진하는 오너 3·4세들과 극명하게 대비되는 부분이다. 기업 경영성과 평가사이트 ‘CEO스코어’에 따르면 50대 그룹의 총수 일가가 입사한 뒤 임원이 되는 데 걸린 시간은 평균 4년11개월에 불과했다. 기업의 기초인 생산현장을 이해하는 것은 물론 직원들의 애로를 공감하기에는 턱없이 부족한 시간이다. 준비가 부족한 오너 3·4세로의 경영권 승계를 우리 사회가 불안하게 바라보는 이유이기도 하다.
구 명예회장이 오너 경영인들에게 던진 또 다른 교훈은 ‘아름다운 은퇴·이별’이다. 그는 70세이던 1995년 장남인 고(故) 구본무 회장에게 그룹을 넘겨주고 경영 일선에서 스스로 물러났다. 우리 대기업에서 선대 회장의 유고 등 아무런 사고 없이 경영권 승계가 이뤄진 첫 사례였다. 은퇴를 거론하기 이른 나이에 그가 물러난 것은 경영혁신을 위해 세대교체가 필요하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구 명예회장 퇴임 이후 3대에 걸쳐 57년간 이어져 온 구씨와 허씨 양가의 동업도 LG와 GS그룹의 계열분리로 잡음 없이 마무리됐다.
이처럼 경영권에 대한 욕심이나 집착 없이 스스로 물러날 때를 아는 구 명예회장의 행보는 경영권을 두고 부자·부녀·형제·자매간 다툼과 소송전을 벌이기 일쑤인 한국 경영계에 큰 울림을 던진다.
오너 경영인 일가의 경영권 싸움과 자질·갑질 논란 등으로 반기업 정서가 만연한 지금 구 명예회장 같은 ‘참 경영인’이 새삼 그리워지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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