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사내칼럼

[목요일 아침에]'새로운 10년'을 말하지 않는 나라

김영기 논설위원

경제·교육까지 침투한 이념 실험

어설픈 국가개입으로 부작용 속출

신뢰 사라지고 성장호르몬은 고갈

암울한 국가의 미래 두렵지않은가

김영기 논설위원



1970년 6월 초, 정주영 현대그룹 회장은 피가 말라갔다. 경부고속도로 개통 예정일까지 한 달여밖에 남지 않았는데 마지막 구간이 거대한 성벽처럼 공사를 가로막았다. 바로 충북 옥천군과 영동군을 연결하는 당재터널(현 옥천터널)이었다. 절암토사로 된 퇴적층은 몇 ㎝도 못 나가 무너져 내렸다. 9명이 목숨을 잃었고 공사장을 떠나는 인부가 속출했다. 정 회장은 결국 500여명의 전 인력을 투입해 밤낮없이 일하는 돌관(突 貫) 체제로 바꾸고 20배 빨리 굳는 조강시멘트를 쏟아부었다. 6월27일 밤11시, 마침내 터널이 뚫렸다. 아무리 당겨도 반년이 걸린다던 공사는 25일 만에 마침표를 찍었다. 당재터널은 어떤 난관도 극복해내는 ‘캔 두(can do) 정신’의 결정판이자, 노동자와 기업인의 눈물로 일군 대한민국 경제사의 상징물이다.

전쟁의 폐허에서 개발의 싹을 틔운 후 우리 경제는 불가능을 가능으로 만든 역사의 연속이었다. 세계로부터 놀림을 당하며 만들어낸 현대자동차와 모래벌판에서 일궈낸 세계 1위의 울산 미포조선소, 공사비를 위해 시민들이 절미(節米)운동까지 벌인 끝에 한국 기술진에 의해 처음 건설된 양화대교, 중화학 공업의 문을 연 충주 비료공장까지…. 노벨경제학상 수상자 로버트 루카스의 말처럼 한국의 성장은 ‘기적’이었고 걸출한 예술작품이었다.


새로운 10년을 눈앞에 둔 지금, 우리는 과연 어느 시대를 살고 있는지 자문해본다. 학자들의 진단을 빌리지 않더라도 한국은 수년 전부터 선진국 문턱에 서 있다. 우리 현실에 대한 걱정의 소리가 들려도 한 단계 높은 레벨로 가는 성장통이라 봤고 여전히 독버섯처럼 깔린 불공정과 부패, 문화적 미성숙함은 압축성장의 잔재이자 소수 권력층의 일탈이라 자위해왔다. 이 고비만 넘으면 진정한 선진국이 될 것이라고 기대감을 품었다. 그것이 탄핵의 아픔에도 지금의 정부를 탄생시킨 이유이기도 하다. 대한민국이 지속가능하도록 진일보한 사회적 시스템과 도구를 준비하는 것, 미래를 위한 새로운 경제적 부가가치를 만들고 이에 걸맞은 선진형 문화와 전통이 움트게 하는 것, 현 정부에 주어진 역사적 소명은 그만큼 중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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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이 정권은 기회와 시간을 너무 많이 흘려보냈다. 성장률이 2%조차 버겁고 40대 가장들이 실직으로 거리를 헤매는 작금의 현실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다. 나라 곳간을 화수분처럼 여기는 것도 소득주도 성장을 도그마처럼 고집하니 왈가왈부하는 것 자체가 이제는 무의미하다.

현 정부가 진정 씻어내기 힘든 잘못은 국가의 미래를 만들어낼 자양분을 소멸시키고 있다는 것이다. 폴 케네디 예일대 석좌교수는 ‘강대국의 흥망’에서 강국의 조건으로 경제력과 군사력을 꼽으면서, 이 둘의 균형을 유지할 신(新)기술과 경제주체의 자율 및 경쟁을 얘기했다. 이를 대입하면 대한민국은 지금 강대국은커녕 불임의 상태에 빠져들고 있다 해도 지나치지 않다. 정치도 모자라 경제와 교육에까지 침투한 이념 실험은 나라 전체의 생산적 담론을 실종시켰다. 원전과 이공계를 떠나는 인재, 태반이 기초학력 수준조차 되지 않는 수학교육의 현실, 규제로 실험을 못해 미국으로 가는 자율주행 기술자…. 우리 땅은 이렇게 인재의 불모지가 돼가고 있다. 해외로 나가는 기업은 최고치를 갈아치우는데 우리를 찾는 외국인 투자는 바닥을 뚫으며 성장의 호르몬이 메말라가고 있다. 어설프게 휘두르는 국가개입의 칼날은 집값을 치솟게 하고, 흘러넘치는 돈이 탐욕의 미끼가 되는 모습에 젊은이들은 상실감으로 허우적댄다. 이 모든 것보다 더 아픈 것은 나라의 버팀목인 민주주의와 시장경제에 대한 확신과 사회적 신뢰가 사라지고 있다는 점이다.

미래 예측서인 ‘세계미래보고서 2020’의 서문은 “두려움이 아닌 기대감으로 미래를 상상하라”고 말한다. 하지만 기적의 경제개발이 만들어냈던 영양분이 무섭게 고갈돼가고, 위정자 누구도 새로운 10년을 말하지 않는 현실 앞에서 대한민국의 미래는 두렵기만 하다. /김영기 논설위원 young@sedaily.com

김영기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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