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장이 제 기능을 거의 못하는 말기 심부전 환자는 뇌사자의 심장을 이식받아야 근본적 치료가 가능하다. 하지만 이식을 받기까지 혈액형 등에 따라 대개 6~12개월 이상을 기다려야 한다. 그래서 불과 1~2년 전만 해도 심장이식 전에 사망하는 경우가 적지 않았다.
하지만 대당 1억5,000만원이나 하는 고가의 심실보조장치(VAD)에 2018년 9월말부터 건강보험이 적용돼 대당 본인부담(5%)이 750만원 수준으로 낮아지면서 그런 불상사가 크게 줄고 있다. 수술비·입원비 등을 포함한 총 본인부담은 1,000만~1,500만원 수준.
VAD를 이식받지 못하면 심장 기능과 혈액순환 저하로 폐·간·콩팥 등 다른 장기들까지 기능을 잃어가 결국 생명을 잃게 된다. ‘보조 인공심장’으로 불리는 VAD는 체외용(영유아 등 소아용)과 체내용(성인용)으로 나뉜다. 체외용은 식품의약품안전처로부터 양심실·좌심실·우심실용으로 모두 허가를 받았지만 심장쪽에 이식하는 체내용은 좌심실보조장치(LVAD)로만 허가를 받았다. 어느쪽이든 대부분 대동맥을 경유해 혈액을 온몸으로 뿜어주는 심장의 메인 펌프인 좌심실의 기능을 보조하는 LVAD를 주로 이식한다. 체외 전원장치와는 전선으로 연결돼 있다.
워낙 고가이다 보니 국내 첫 이식수술이 이뤄진 2012년부터 건강보험이 적용되기 전까지 6년여 동안 25명만이 VAD 이식수술을 받았다. 반면 건보 적용 이후 지난해말까지 1년 3개월 동안 수혜자는 80여명으로 종전보다 3.2배 이상 증가했다. 심장이식을 받을 기회를 얻기 어려운 70세 이상 고령 환자의 경우 생존기간 생명을 유지하고 일상생활을 할 수 있게 해주는 ‘최후의 생명줄’ 역할도 한다.
◇삼성서울-성인, 세브란스-영유아 LVAD 이식 두각
몸집과 심장이 작아 VAD를 몸 안에 이식할 수 없는 영유아나 초등학교 1·2학년생 환자도 건보 적용 전후 각각 5명이 체외형 VAD의 수혜를 봤다. 성인에 비해 인구 비중이 작은데다 심장이식을 받아야 할 정도로 위중한 경우에만 수술이 이뤄지기 때문에 건보 적용 이후에도 수혜자가 급증하진 않고 있다.
VAD와 의료기술·수술 노하우의 발달에 따라 VAD 이식과 관련된 신기록도 잇따르고 있다.
성균관대 삼성서울병원 심부전팀은 최근 국내 처음으로 가슴뼈를 절단하지 않고 LVAD를 이식하는 수술에 성공했다. 연세대 세브란스 심장혈관병원 의료진이 수술한 한 영유아는 2018년 체외 LVAD를 단 뒤 심장 기능이 정상화돼 LVAD를 뗐고, 다른 영유아는 생명을 잃을 위기를 LVAD로 넘긴 뒤 뇌사한 영유아의 심장을 이식받는 국내 첫 사례가 됐다.
LVAD를 좌심실 근처에 이식하려면 폐·심장 등을 물리적 자극으로부터 보호하는 가슴우리(흉곽)의 일부를 절단해야 한다. 가슴우리는 갈비뼈 12개 중 10개가 가슴 앞쪽에서 갈비연골을 통해 가슴뼈와, 뒤쪽에선 갈비뼈 12개가 등뼈(척추 중 흉추)와 연결돼 폐·심장의 활동량에 맞춰 꽤 신축성 있게 움직인다.
그래서 LVAD 체내 이식은 그동안 가슴 중앙을 세로로 20㎝가량 째고 그 밑에 있는 가슴뼈(세로 10~15㎝)를 전기톱으로 절단한 뒤 이뤄졌다. 하지만 삼성서울병원 심부전팀은 최근 가슴뼈를 절단하지 않고 왼쪽 가슴의 심장 위·아래 두 곳 피부를 5~8㎝가량만 째고 LVAD를 이식하는 데 성공했다. 환자는 심근경색 등으로 저하된 심장 기능이 회복하지 않아 절개를 최소화한 최소침습적 수술이 필요했다. 절개부위를 줄이면 출혈·우심실부전 위험이 줄어든다.
다만 2세대보다 소형화된 3세대 LVAD도 손가락 하나 정도 들어갈 수 있는 갈비뼈 사이로 밀어넣을 순 없기 때문에 환자의 상태에 따라 심장 아래쪽 갈비뼈 1개 절단은 불가피하다. 그래도 가슴뼈 전부를 절단하는 기존 수술과 비교하면 꽤 작은 ‘공사’다. 환자는 수술 후 상태가 호전돼 최근 퇴원했다.
◇체외 LVAD 단 영유아 6~10%, 6개월 내 심장 기능 정상화
건보 적용 이후 80여건의 체내형 LVAD 이식수술 중 약 30건의 수술한 한 삼성서울병원 심부전팀의 조양현 교수(심장외과)는 “최근에는 심장이식을 받기 어려운 고령 환자가 LVAD를 이식받는 사례가 늘고 있다”며 “이식 후에는 혈액검사·항응고제 복용 등을 통해 혈전이 생기지 않게 잘 관리하는 게 중요한데 항응고제의 효과가 일정하지 않고 뇌출혈 등 위험에서 자유롭지 않은 게 부담요인”이라고 했다.
조 교수는 LVAD 수술을 받을 정도로 상태가 악화되지 전에 조기 치료를 받는 게 더 중요하다는 점도 강조했다. 그는 “허혈성 심근증, 관상동맥·심장판막 질환, 심장이 지나치게 천천히 뛰어 어지럼증·실신 증상 등이 나타나는 서맥성 부정맥 환자라면 심부전 전문가 진료를 통해 초기 단계에 적절한 약을 처방받아 복용하거나 인공심장박동기 시술 등 비교적 간단한 치료를 받으면 말기 심부전까지 안 가거나 상태가 나빠지는 걸 굉장히 늦출 수 있다. 심지어 회복되는 경우도 있다”고 소개했다.
영유아의 경우 심장의 수축·이완을 가능케 하는 심장근육이 점차 약해지고 굳어지는 희귀 심장질환인 ‘특발성 제한 심근병증’을 가진 경우가 많다. 혈액순환이 나빠져 폐·간·콩팥 등 각종 장기가 제 기능을 잃어(다발성 장기부전) 몇 해 전만해도 심장이식을 받지 못하면 사망할 수밖에 없었던 중증 심장질환이다. 하지만 LVAD 개발과 건강보험 적용 덕분에 생명을 건지는 영유아·어린이가 늘어나고 있다. 체외 LVAD를 단 소아의 6~10%는 과부하가 걸렸던 심실 등 심장 기능이 6개월 안에 회복돼 장치를 뗄 수 있게 된다.
생후 1년도 안 된 아기에게 체외 LVAD를 달아 시간을 번 뒤 심장이식에도 성공한 신유림 심장혈관외과 교수는 “심장기능 저하로 전반적인 신체기능과 면역력이 떨어진 상황에서 패혈증 같은 감염질환이 발생하면 생명을 유지하지 못할 수 있다”며 “체외 LVAD를 달고 생명·건강을 유지하면서 심장이식을 기다리면 혈액형 등에 따라 다르지만 영유아도 대개 6~12개월 안에 심장이식 기회를 잡을 수 있다”고 했다.
VAD 특발성 제한 심근병증의 증상에 대해 그는 “말·표현을 못하거나 서투른 영유아의 경우 잘 먹지 못하고 식은 땀을 흘리고 헉헉대거나 떨어진 심장기능 때문에 뒤집기도 못하고 가만히 누워 있는 경우가 많은데 아기가 순해서라고 착각하는 경우가 적지 않다”며 “아기가 조금 크면 혈액순환과 장 운동 기능이 떨어져 배가 아프고 소화가 안 되고 잘 토하는데 심장질환이 아니라도 그런 증상이 나타날 수 있어 진단까지 시간이 걸리는 경우가 많다”고 주의를 당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