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의료기기 제작업체인 A사의 B대표는 미국·유럽연합(EU) 등 선진국을 대상으로 시장조사를 진행하면서 ‘환자 맞춤형 기기’에 대한 수요가 급증하고 있다는 것을 확인했다. 인공관절·인공수정체 등 인체에 이식하는 의료기기 사용이 늘고 있는 가운데 선진국들은 환자의 개별적인 특성을 고려해 기기를 제작하는 데 아무런 제약이 없었다. B대표는 곧장 한국으로 돌아와 환자의 혈관 위치와 모양, 연령 등에 따라 규격을 달리하는 맞춤형 스텐트(혈관에 삽입하는 의료기기) 출시를 준비했다. 해외에서는 이미 보편적이지만 국내에서는 개척되지 않은 시장을 뚫어보겠다는 B대표의 꿈은 금세 허물어졌다. 관련 부처인 식품의약품안전처에는 주문 제작형 스텐트를 관리할 수 있는 제도가 없었기 때문이다. 이에 B대표는 지난해 12월 국무조정실 신산업규제혁신위원회에 “환자 맞춤형 스텐트에 대한 제조 허가를 내달라”고 공식 건의했으나 “관계부처와 긴밀히 검토해보겠다”는 원론적인 답변만 돌아왔다.
# 바이오·의료업체인 ‘도프’는 지난 2018년 세계 최초로 인체에서 나오는 폐지방을 활용해 미용·의약품을 만드는 기술을 개발했다. 폐지방은 지방흡입 시술을 한 뒤 남은 지방을 뜻한다. 하지만 도프가 개발한 신기술은 연구목적 이외에는 폐지방의 재활용을 원천 금지한 ‘폐기물관리법’에 저촉돼 상용화에 이르지 못했다. 이 회사는 환경부·산업통상자원부·보건복지부 등 관계부처를 일일이 찾아가 규제 개선을 호소한 뒤 아무런 진전이 없자 지난해 12월 A사와 함께 국무조정실의 문을 두드렸으나 아직 속 시원한 대답을 듣지 못했다.
정부가 겉으로는 “규제혁신으로 경제활력을 끌어올리겠다”는 구호를 외치고 있지만 정작 신산업을 선도하는 기업들은 ‘과잉규제의 덫’에 갇혀 날개를 펴지 못하고 있다. 기업들이 마음껏 뛰어놀 수 있는 규제 샌드박스 처리 현황은 미미하고 정치권은 경영 환경을 옥죄는 규제 법안을 쏟아내기 바쁘다. ‘기업은 일류인데 규제는 삼류’라는 전문가들의 지적이 나오는 이유다.
바이오업계 규제완화 외면하는 정부
4차 산업혁명 시대의 핵심성장 동력인 바이오 분야에서 기업을 가로막는 규제는 맞춤형 스텐트와 폐지방 재활용 불허 외에도 수두룩하다. 업계는 수년 전부터 소비자가 의료기관을 거치지 않고 민간기업에 유전자 검사를 의뢰하는 ‘DTC’ 허용 항목을 확대해달라고 줄기차게 요구해왔다. 이에 복지부는 지난해 12월18일 유전자 서비스 허가 항목을 12개에서 56개로 늘렸다. 하지만 업계의 핵심 요구 사항이었던 암·치매 등 중증질환에 대한 유전자 검사는 허가 항목에서 제외됐다. 이승규 한국바이오협회 부회장은 “정부는 피부 노화 방지처럼 치료 목적과는 상관이 없고 관련 시장도 크지 않은 ‘웰니스’ 분야만 허용하고 있다”며 “공무원들이 ‘보신주의’에 사로잡혀 생색 내기로만 일관하고 있어 답답할 따름”이라고 토로했다.
벤처육성 찬물 끼얹는 CVC 규제
글로벌 무대에서 ‘초격차’를 만들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대기업들의 활동 범위를 좁히는 규제도 여전하다. 대표적인 것이 ‘기업주도형 벤처캐피털(CVC)’의 허용 여부를 둘러싼 논란이다. CVC는 비(非)금융권의 대기업이 사업 영역 간 시너지를 높이기 위해 자회사 형태로 설립하는 벤처캐피털을 뜻한다. 정부나 기관투자가들이 단순히 재무적 이익을 목표로 공동으로 투자하는 일반 벤처캐피털과는 차이가 있다. 국회입법조사처가 지난해 12월31일 발간한 보고서에 따르면 정보통신기술(ICT) 분야를 중심으로 글로벌 기업들의 CVC 투자가 활발해지면서 2013년 106억달러에서 2018년 530억달러로 급증했다. 구글 벤처스, GE 벤처스, 인텔 캐피털 등이 현재 활동 중인 대표적인 글로벌 CVC로 꼽힌다.
하지만 한국의 공정거래법 제8조는 ‘금산분리’ 원칙에 따라 금융지주회사가 아닌 일반지주회사는 금융자본인 CVC를 보유할 수 없도록 규제하고 있다. 대기업의 문어발식 확장과 자본차익을 노린 금융투자를 억제하겠다는 취지지만 재계는 벤처 생태계의 활성화를 가로막는 철 지난 규제라고 항변하고 있다. 박재영 국회입법조사처 조사관은 “지주사 체제가 아닌 삼성과 달리 LG·SK·GS 등은 모두 이 규제의 적용을 받는 그룹들”이라고 설명했다.
규제 샌드박스 처리 실적도 미미
새로운 제품이나 서비스에 대해 일정 기간 규제를 면제·유예해주는 ‘규제 샌드박스’의 처리 현황도 기업들의 요구를 충족하기에는 역부족이다. 정태옥 자유한국당 의원실에 따르면 지난해 1~11월 산업부·과학기술정보통신부·금융위원회 등에 접수된 규제유예 신청(226건) 가운데 40%에 육박하는 85건은 정부의 승인을 받지 못했다.
또 법안 논의를 통해 기업의 애로를 해소해야 할 입법부는 오히려 규제를 늘리는 데만 골몰했다. 2016년 5월 출범한 20대 국회는 3년 7개월 동안 무려 3,795건의 규제 법안을 의원입법으로 발의했다. 이들 법안에 담긴 규제 조항은 총 7,112개나 됐다. 최경규 동국대 경영학과 교수는 “싱가포르의 경우 규제혁신의 속도를 높이기 위해 4차 산업혁명과 관련된 업종의 경우 일종의 ‘패스트트랙’인 ‘익스프레스 샌드박스’를 운영하고 있다”며 “우리 정부도 규제 샌드박스의 실효성을 높이고 이중·삼중 규제를 혁파하기 위한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고 지적했다. /세종=나윤석기자 nagija@sedaily.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