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흘이 멀다 하고 하늘을 뒤덮던 미세먼지가 물러나고 하늘이 맑게 갰다. 모처럼 파란 하늘에서 쏟아지는 햇볕을 쬐며 서산시로 들어섰다. 서해대교와 행담도 휴게소를 지나 조금 더 달리자 해미읍성이 눈에 들어왔다. 오랜만에 찾은 탓에 서산의 풍광이 낯설었다. 바다가 가까워선지 바람이 불어와 성벽에 꽂힌 깃발들이 힘차게 나부꼈다.
해미읍성을 찾은 것은 이 사적이 현존하는 읍성 중 가장 온전하게 보전된 성곽이기 때문이다. 읍성들의 공통점은 모두 바닷가 가까이에 있다는 것인데 이는 읍성들이 왜구의 침입에 대비한 구조물이라는 것을 입증한다.
해미(海美)라는 지명을 그대로 풀어보면 ‘아름다운 바다’라는 뜻인데 이 지명은 정해현(貞海縣)과 여미현(餘美縣)에서 한 글자씩 따와 생겨난 이름이다.
읍성을 축조한 것은 1416년 태종이 서산 도비산에 사냥을 나왔다가 해미에 들렸을 때 지세가 왜구 방어에 적당한 곳이라고 판단해 덕산에 있던 충청병영을 이전하기로 하면서다. 1417년(태종 17년)부터 축성을 시작해 세종 3년인 1421년에 완공했다. 해미읍성은 이후 충청도에 주둔하는 육군을 지휘하는 야전사령부 역할을 하다가 1652년 충청병영이 청주로 이전하며 충청병영절도사가 떠나가게 됐다.
하지만 충청도 5진(陣) 중 하나인 호서좌영이 들어서 책임자가 호서좌영장과 해미현감을 겸하면서 지방관청과 백성들이 거주하는 읍성으로 거듭나게 됐다. 조선시대 읍성들은 일반적으로 관아와 병영의 역할을 겸했는데 해미읍성도 예외는 아니었다. 이 같은 권력의 집중은 훗날 홍성·해미·서산·태안·덕산·예산· 당진 등 내포 지역의 천주교 박해 때 순교가 집중되는 실마리가 된다.
겨울 오후의 햇볕을 쬐며 성안 쪽을 돌아보는데 기자와 함께한 박영섭 학예사가 “안쪽에는 4~5단의 계단식 석축을 쌓고 그 위를 흙으로 덮어 내벽을 만든 후 반듯하게 다듬은 성돌로 외벽을 쌓았다”고 설명했다. 박 학예사는 “외벽 성돌에는 공주·청주·임천 등 각 고을명이 새겨져 있는데 이것은 고을별로 부역을 나온 백성들이 일정 구간의 축성을 분담하면서 책임소재를 명확히 하기 위해 남긴 표식”이라고 말했다.
1578년 이순신 장군이 군관으로 근무하기도 했던 읍성 안에는 동헌과 옥·객사 등이 복원돼 있고 뒤편 언덕 위에는 소나무 군락이 숲을 이루고 있다. 해미면 남문2로 143.
해미읍성을 구경했다면 꼭 들러봐야 할 곳이 해미순교성지다. 나들이객들은 읍성 구경을 마치면 제각기 흩어지는데 이야깃거리는 정작 순교성지에 더욱 풍부하다.
천주교는 1784년(정조 8년) 이승훈이 베이징에서 영세를 받고 돌아와 교회를 건립하면서 서학이라는 학문으로 조선에 소개됐지만 이후 종교의 색깔을 드러내면서 박해를 받기 시작했다. 1790년 시작된 천주교 박해는 병인양요와 1868년 독일 상인 오페르트의 대원군 아버지 남현군 묘 도굴 사건 이후 정점으로 치달았다. 이때 내포 지방 13개 군현을 담당하던 해미읍성 겸영장은 군권과 관권을 한 손에 쥐고 막강한 권한을 행사했던 까닭에 조정에 보고하지도 않고 해당 지역 교도들을 잡아들여 처형했다. 그 숫자는 1,000여명에 달했다.
해미순교성지는 1985년 4월 공소가 성당으로 승격되면서 같은 해 6월 순교 선열 현양회가 발족했고 2000년 8월 기공에 이어 3년 만인 2003년 6월17일 완공했다. 이곳에 성지가 자리를 잡은 것은 농부들이 처형자의 유골을 캐내 냇물에 버렸다는 증언 등이 이어지며 생매장터라는 것을 확인했기 때문이다. 이 같은 증언에 따라 1935년 서산성당의 5대 신부인 바로 베드로 주임신부가 유해를 발굴해 기념관 등에 보존하고 있다.
2014년 8월16일에는 프란치스코 교황이 방한, 광화문에서 조선 순교자 124위 시복식을 거행했고 해미 순교자인 인언민(마르티노), 김진후(비오), 이보현(프란치스코)의 3위가 함께 시복됐다. 교황은 이튿날 해미순교성지에 들러 순교자 3위의 기념비 제막식에도 참석했다.
해미순교성지에는 무덤을 형상화한 기념관과 성당이 있다. 박해 때 신자들을 묶어 물웅덩이에 빠뜨려 수장한 ‘진둠벙’, 생매장당한 무명의 순교자들을 기리는 높이 16m의 ‘해미순교탑’, 무명 순교자의 묘, 천주교도들을 던져 죽이던 ‘자리개돌’이 전시돼 처절했던 역사를 증언하고 있다. 해미면 성지1로 13.
/글·사진(서산)=우현석객원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