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19년 1월28일, 영국인 스탬퍼드 래플스(당시 37세)가 말라카해협 남단의 습지에 내렸다. 영국 동인도회사의 관리인 래플스가 원주민들에게 밝힌 상륙 목적은 무역 포스트 확보. 진짜 속셈은 따로 있었다. 자바에서 페낭을 거쳐 말라카해협, 오스트레일리아 대륙을 연결해 영국의 배타적인 군사력 우위를 다진다는 것. 유력한 토호나 왕국을 만나면 영국의 인도 총독을 대왕으로 모시는 대신 독립을 유지하고 안전을 보장하겠다고 꼬셨다. 영국의 위세가 하늘을 찌르던 시절이어서 현지 술탄의 왕자도 래플스의 제의를 받고는 즉각 협정을 맺었다.
오늘날 아시아 최고 부국이며 제1의 무역항인 싱가포르의 근대가 이렇게 열렸다. 싱가포르는 유사 이래 무수한 변화를 겪어왔던 지역. 말레이와 타이·버마 등의 각축 속에 주인이 바뀌다 15세기 초 이슬람 술탄국이 형성되고 1511년에는 교역소를 세운 포르투갈이 재해권을 잡았다. 1641년 포르투갈을 물리치고 지배권을 확립한 네덜란드는 인도네시아와 말라카해협의 안전을 바탕으로 삼아 일본까지 항해하는 극동 항로에서 짭짤한 수익을 올렸다. 영국은 1811년 나폴레옹이 네덜란드를 합병하자 기다렸다는 듯이 자바, 말하카해협에도 손을 뻗쳤다.
래플스가 무역항 건설을 위해 싱가포르에 상륙한 이유도 오스트레일리아 대륙 유사시를 대비한 후방 군사기지와 중국과 일본 진출까지 넘볼 수 있는 무역 포스트를 건설하자는 데 있었다. 결과적으로 래플스의 큰 그림은 실현되지 않았다. 프랑스 견제를 위한 네덜란드의 도움이 필요했던 영국 정부가 말라카와 자바를 네덜란드에 반환했기 때문이다. 그나마 래플스가 설계한 도시건설계획안이 실행되며 습지는 빠르게 무역소로 변모해갔다. 래플스는 8개월만 머물다 떠났으나 입지가 좋은 싱가포르는 새롭게 떠오른 중국 시장을 향하는 영국의 전초기지 역할을 해냈다.
수마트라와 영국에 머무는 동안 열 살 연상 부인과의 사별과 재혼, 자식들의 잇따른 사망이라는 불행을 겪었던 래플스가 1823년 다시 찾아왔을 때, 싱가포르는 활기 넘치는 무역항으로 바뀌었다. 래플스는 학교를 세우고 도박과 마약·노예제도를 금지하며 1824년 영구귀국하기까지 싱가포르의 기초를 닦았다. 싱가포르를 건설한 주역은 래플스 부재기간에 오랫동안 현지에 근무했던 파커 소령이라는 견해도 있으나 번영을 구가 중인 싱가포르에서 래플스라는 이름은 호텔과 기념관, 거리와 학교, 광장과 조선소 등 도처에서 빛난다. 자유무역과 성장의 과실은 영국이 아니라 화교 네트워크가 다 가져갔지만.
/권홍우선임기자 hongw@sedaily.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