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일 IT·금융·법조 관계자의 말을 종합하면 오라클은 최근 법무법인을 선임하고 신한은행이 데이터베이스관리시스템(DBMS)을 무단으로 사용한 만큼 라이선스 비용 수백억원을 내라며 내용증명을 보냈다. 오라클이 요구한 금액은 최소 400억원 이상으로 전해졌다.
오라클은 정액제 라이선스를 쓰던 신한은행이 종량제 전환 직전 실제로 쓰지 않는 서버를 대량 증설하고 DBMS를 설치해 계약을 위반했다고 보는 것으로 알려졌다. 종량제 전환 시 추가로 서버를 만들면 다시 라이선스를 사야 하는데 이때를 대비해 미리 소프트웨어(SW)를 확보했다는 얘기다. 업계의 한 관계자는 “오라클이 내용증명까지 보낸 것은 법적 다툼까지 내다본 일”이라며 “SW 제값 받기 문화가 확산하는 시점에서 국내 기업들의 관행을 되돌아보는 계기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앞서 신한은행은 오라클의 DBMS 관련 무제한라이선스계약(ULA)을 지난해 11월까지 맺었다. ULA 기간 중에는 서버를 증설하거나 신규 프로그램을 도입해도 추가 비용이 들지 않기 때문에 신한은행은 마음껏 SW를 설치할 수 있다. 문제는 ULA 계약 종료 과정에서 벌어졌다. 일반 계약 전환 시 오라클은 고객사가 기존에 쓰던 솔루션은 그대로 인정해주는데, 신한은행이 이때 실제로 쓰지도 않는 대량의 ‘깡통 서버’를 증설한 뒤 오라클 SW를 깔았다고 오라클은 판단한 것으로 보인다. 미래에 추가로 필요한 SW까지 미리 쟁여뒀다는 얘기다. 꼭 같지는 않지만, 무한 제공 고깃집에서 식사를 마치기 직전 며칠 뒤에 먹을 수십 인분 고기를 미리 싸온 것과 비유할 수 있다.
통상 ULA 종료 때 예비용 라이선스를 고객사가 요구할 경우 적정선까지는 암묵적으로 제공하는 게 관례로 여겨진다. 이 때문에 오라클이 소송까지 감수하는 배경을 두고 업계에서는 신한은행이 실제 사용량을 의도적으로 과도하게 부풀렸다는 증거가 포착됐을 가능성이 높은 것으로 보고 있다.
오라클은 DBMS 분야 세계 시장 점유율 절반을 훨씬 웃도는 절대 강자로 꼽힌다. 행정안전부가 지난해 국내 공공부문 1,000여곳을 대상으로 한 조사에서 오라클의 DBMS 점유율은 70%에 육박했으며 마이크로소프트(18.1%)와 큐브리드(5.2%), 티맥스소프트(5.0%) 등 후발주자와 상당한 격차를 나타냈다. 민간기업 점유율도 이와 크게 다르지 않다. 기업의 각종 데이터를 효율적으로 저장하고 운용하도록 돕는 DBMS는 자체 서버와 전산체계를 갖춘 곳의 필수 SW이고, 가장 대중적인 솔루션을 보유한 오라클은 독보적 지위에 힘입어 ‘슈퍼 을’로 통하지만 그렇다더라도 고객사를 상대로 법적 다툼을 불사하는 모습은 매우 이례적이란 게 업계의 평가다. 업계의 한 관계자는 “일부 글로벌 정보기술(IT) 기업과 국내 기업 간 분쟁은 있었지만 오라클의 이번 조치는 사례를 찾기 힘들다”며 “오라클은 라이선스로 먹고사는 사업 구조다 보니 미래 수익원을 박탈당했다고 보고 이번 건을 간단하게 생각하지 않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양 사간 협상이 타결된다면 소송전으로 번지지 않을 수 있지만, 오라클이 법률 조치 사전 단계인 내용증명까지 보낸 만큼 갈등이 쉽게 풀리지는 않을 것으로 관측된다. 이와 관련해 신한은행의 한 관계자는 “원만한 협상을 위해 노력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업계는 이번 분쟁을 예의주시하고 있다. 오라클은 수십 곳의 국내 대기업과 ULA 계약을 맺고 있다. 이번 사태의 추이가 다른 기업들과 계약 관계에도 영향을 미칠 수 있다. 오라클이 소송전을 감수한 것도, 자칫 잘못된 선례를 남길 경우 국내 시장에서 대규모 기대 이익이 물거품이 될 수 있다는 위기감 때문이라는 해석이 나온다.
기업들이 자체 서버를 줄이고 클라우드로 전환하거나 오라클 DBMS를 견제하는 저렴한 오픈소스 솔루션이 잇따라 등장하며 오라클의 아성이 흔들리고 있는 점도 이번 소송과 관련 깊다는 시각도 있다. 오라클도 클라우드 서비스로 사업을 확장하고 있지만 기존 텃밭인 솔루션 부문 쇠퇴는 수익에 악영향을 주고 있다. 갈수록 입지는 좁아지는데 라이선스 문제까지 생기자 공세를 강화했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