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법원의 이번 판단은 전원합의체까지 나서 처음으로 직권남용의 범위와 기준을 정했다는 점에서 국정·사법 농단 등 직권남용 혐의가 적용된 기존 재판에도 직접적인 영향을 미칠 것으로 전망된다. 단순히 직무에서 정한 권한을 남용하는 것에서 나아가 상대방이 의무 없는 일을 했는지까지 입증해야 하기에 앞으로 검찰이 지금처럼 직권남용죄를 쉽게 적용하기 어려울 것이라는 전망도 나온다.
직권남용죄는 그간 입증이 까다로워 하급심마다 법원의 해석이 엇갈렸다. 형법 제123조의 직권남용권리행사방해죄는 ‘공무원이 직권을 남용해 사람으로 하여금 의무 없는 일을 하게 하거나 사람의 권리행사를 방해한 때에는 5년 이하의 징역, 10년 이하의 자격정지 또는 1,000만원 이하의 벌금에 처한다’고 규정한다. 하지만 각 조항의 해석을 놓고 일선 재판부에서도 판단이 매번 갈렸다.
대법원은 이번에 블랙리스트 사건의 직권남용 혐의를 판단하면서 직권을 남용했더라도 의무가 없는 일을 하게 했는지까지 입증해야 직권남용죄를 적용할 수 있다고 강조했다. 우선 김 전 실장이 청와대 참모와 문화부 공무원에게 블랙리스트 대상자에 대한 지원을 배제하라고 지시한 것은 직권남용이기에 유죄로 봤다. 이 지시로 인해 문화부 산하기관인 한국문화예술위원회·영화진흥위원회·한국출판문화산업진흥원 소속 직원이 실제로 지원을 배제한 것도 직권남용이어서 유죄로 판단했다.
하지만 산하기관 직원이 수시로 상부에 진행상황을 보고하고 각종 명단을 송부한 행위는 공무원 본연의 업무에 포함된 것이어서 의무 없는 일을 하게 한 것으로 단정하기 어렵다며 파기환송을 결정했다. 기존 판례대로라면 직권남용 여부만 판단해 직권남용죄를 적용할 수 있었지만 앞으로는 공무원이 직권을 남용해 다른 사람에게 의무가 아닌 일을 하도록 시켰다는 것까지 입증해야 한다는 의미다.
대법원은 “행정기관의 의사결정과 정책집행은 다른 공무원·부서·유관기관 등과의 협조를 거쳐 이뤄지는 것이 통상적”이라며 “이러한 관계에서 상대방의 요청을 청취하고 자신의 의견을 밝히거나 협조하는 등 요청에 응하는 행위를 하는 것은 특별한 사정이 없는 한 법령상 의무 없는 일이라고 단정할 수 없다”고 지적했다.
대법원이 직권남용죄에 대한 기준을 새롭게 제시하면서 직권남용 혐의로 재판을 진행 중인 하급심 재판부의 판단에도 영향이 불가피할 것으로 전망된다. 박 전 대통령은 ‘삼성 뇌물’ 사건에서 직권남용 혐의가 다른 혐의와 함께 적용됐다. 다스의 미국 소송에 공무원을 동원한 혐의로 기소된 이 전 대통령도 1심에서 직권남용 혐의는 무죄를 받았지만 검찰의 항소로 2심 재판을 받고 있다.
사법행정권 남용 의혹을 받는 양승태 전 대법원장도 법원행정처를 통해 일선 판사의 뒷조사를 한 것과 관련해 직권남용 혐의로 재판에 넘겨졌다. 현 정부 인사로는 조국 전 법무부 장관이 유재수 전 부산시 경제부시장 감찰무마 의혹과 관련해 직권남용 혐의로 기소됐다. 다만 대법원은 이달 초 이른바 ‘서지현 검사 보복인사’로 1심과 2심에서 징역 2년의 실형을 선고받은 안태근 전 검사장의 직권남용 혐의에 대해서는 무죄 취지로 파기환송을 결정한 바 있다.
검찰 입장에서도 새 정부 출범 때마다 ‘적폐수사’를 위한 도구로 쓰인 직권남용죄의 입지가 크게 축소될 것으로 전망된다. 기존에는 주요 권력형 비리를 수사하던 검찰이 직권남용 혐의로 일단 피의자를 구속시킨 뒤 관련 혐의를 추가했지만 앞으로는 직권남용죄를 입증하기 어려워 재판부로부터 중형을 이끌어내기 어려울 것이라는 분석이다. 일각에서는 법원이 사법행정권 남용 의혹에 연루된 판사들의 향후 재판에 대비해 직권남용죄의 적용 기준을 까다롭게 바꾼 것 아니냐는 지적도 나온다.
부장판사 출신의 한 변호사는 “기존에는 직권을 남용했다는 증거만 있으면 바로 직권남용죄를 적용할 수 있었지만 앞으로는 직권남용으로 인해 다른 사람이 의무가 아닌 일을 했는지 입증해야 하기에 검찰 입장에서 혐의 입증이 쉽지 않을 것”이라며 “특히 정권 교체 후 이전 정권 인사들에 대한 정치적 보복용으로 자행됐던 직권남용죄가 등장하는 비중이 크게 줄어들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