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청론직설] "잦은 대입개편 '정치권 票 관리' 탓…정부는 입시서 손떼야"

■'수능 설계자' 박도순 고려대 명예교수

모두 만족할 입시 없는데도 정권마다 땜질 되풀이

국민 35% 지지하면 10년 이상 일관성 유지해야

수능, 절대평가로 영향력 줄이고 심층면접 바람직

대학 선발자율권 보장하고 교육부 해체 검토할 만

수능을 설계한 박도순 고려대 명예교수가 “입시 위주의 교육 병폐를 해소하기 위해 도입한 수능이 과거 학력고사로 전락했다”며 “현행 대로라면 차라리 수능을 폐지하는 게 낫다”고 말했다. 그는 “모두가 만족할 입시제도는 없기 때문에 정부가 입시에서 손떼고 대학의 자율에 맡겨야 한다”고 강조했다. /성형주기자수능을 설계한 박도순 고려대 명예교수가 “입시 위주의 교육 병폐를 해소하기 위해 도입한 수능이 과거 학력고사로 전락했다”며 “현행 대로라면 차라리 수능을 폐지하는 게 낫다”고 말했다. 그는 “모두가 만족할 입시제도는 없기 때문에 정부가 입시에서 손떼고 대학의 자율에 맡겨야 한다”고 강조했다. /성형주기자







4일은 주요 대학의 정시전형 합격자 발표일이다. 수험생과 학부모의 희비가 엇갈리겠지만 대학수학능력시험(수능) 점수로 당락이 갈리는 현실을 유독 안타까워하는 교육 전문가가 있다. 현행 수능 제도를 설계한 박도순 고려대 명예교수다. 수능은 교과서 암기 위주인 ‘학력고사’의 병폐를 개선하기 위해 노태우 정부 시절 테스트를 거쳐 김영삼 정부 집권 첫해인 1994학년도 입시에 전면 도입됐다. 박 교수는 “지금의 수능은 원래 취지를 상실한 채 점수로 줄 세우는 과거 학력고사와 다를 바 없다”며 개탄했다. 2020학년도 입시 시즌은 ‘아빠 찬스’라는 신조어를 남긴 조국 사태와 맞물려 어느 때보다도 입시 제도를 둘러싼 논쟁이 뜨거웠다. 수능을 설계한 박 교수를 만나 우리 사회의 난제인 대입제도 개혁에 대해 얘기를 나눴다.


-학력고사를 대체한 수능을 만든 배경부터 설명해달라.

△입시준비의 부담을 줄여보자는 것이 취지다. 학력고사는 암기 위주의 공부다. 조사에 따르면 3년 지나면 70% 정도를 잊어버린다. 외워서 시험 보도록 하는 것은 안 된다는 결론을 내렸다. 그래서 지능검사와 흡사하도록 개발했다. 수능은 글자 그대로 대학 수업에 필요한 최소한의 학력 측정 시험이다. 그게 언어와 수리였다. 수리는 수학이 아니라 논리적 사고력을 측정하는 것이다.

2020학년도 대입수능시험 성적표가 배부된 지난해 12월 4일 서울 영등포구 여의동 여의도여고에서 수험생들이 성적표들 보고 있다./서울경제DB2020학년도 대입수능시험 성적표가 배부된 지난해 12월 4일 서울 영등포구 여의동 여의도여고에서 수험생들이 성적표들 보고 있다./서울경제DB


-왜 수능이 학력고사로 변질됐나.

△노태우 정부 때 7차례 실험 평가를 했다. 처음에는 언어와 수리 두 가지였고 합격과 불합격 두 단계 평가를 염두에 뒀다. 그런데 과학계가 들고 일어났다. ‘과학 입국’을 한다면서 왜 홀대하느냐고 난리가 났다. 이공계 쪽에서는 영어 원서를 보려면 독해력이 필요하다며 영어를 넣어 달라고 했고 사회과학 분야에서도 과학계와 비슷한 요구가 쏟아졌다. 노 대통령에게 ‘이건 곤란하다’고 했지만 통하지 않았다. 대학마다 변별력을 높이도록 수능을 점수화해 달라는 주문이 수용되면서 상황은 더 꼬이게 됐다. 대학들이 수능을 중요한 전형 요소로 삼겠다고 하니 첫 수능부터 개발 당시의 취지가 훼손돼 버렸다. 줄 세우기 식 학력고사로 전락한 것이다. 원래 의도대로라면 수능 만점자가 2만명 정도 돼야 하는데 1999학년도에서야 만점자가 나왔다.

-수능이 그나마 공정한 평가가 아닌가.

△수능이 객관적이지만 공정하다는 데 동의하지 못한다. 수능의 점수는 지식의 일부를 측정한 것에 불과하다. 더 중요한 것은 측정오차가 있다는 점이다. 지능검사도 오차가 플러스 마이너스 10점이다. 수능은 더 그렇다. 1점 차이로 대학 당락이 결정되고 동점이면 생년월일을 따지는 게 공정한가.

-정부는 조국 사태 이후 수능의 비중을 40%까지 확대하겠다고 했다.

△잘못된 길이다. 교육 당국이 수능 비중을 설정하는 것 자체부터 난센스다. 줄 세우기 식 시험인데 왜 늘리려 하나.

지난해 10월14일 사퇴 의사를 밝힌 조국 법무부 장관이 청사를 나서는 모습. 조국 사태로 학종 불신이 깊어지면서 수능파와 학종파의 논쟁이 격화했다. 문재인 정부의 입시정책도 집권 초기의 수능 무력화에서 수능 확대로 180도 달라졌다./서울경제DB지난해 10월14일 사퇴 의사를 밝힌 조국 법무부 장관이 청사를 나서는 모습. 조국 사태로 학종 불신이 깊어지면서 수능파와 학종파의 논쟁이 격화했다. 문재인 정부의 입시정책도 집권 초기의 수능 무력화에서 수능 확대로 180도 달라졌다./서울경제DB


문재인 대통령이 지난해 10월25일 정부서울청사에서 교육관계 장관회의 모두 발언을 하고 있다. 조국 사태로 정시 확대론이 분출하자 문 대통령은 입시의 단순화·공정성을 주문했다. 유은혜(왼쪽) 교육부 장관은 한 달 뒤 수능 비중의 40% 확대 방안을 내놓았다. /연합뉴스문재인 대통령이 지난해 10월25일 정부서울청사에서 교육관계 장관회의 모두 발언을 하고 있다. 조국 사태로 정시 확대론이 분출하자 문 대통령은 입시의 단순화·공정성을 주문했다. 유은혜(왼쪽) 교육부 장관은 한 달 뒤 수능 비중의 40% 확대 방안을 내놓았다. /연합뉴스


-그럼 수능을 어떻게 개편해야 하나.

△현행대로라면 폐지가 최선이다. 줄 세우기 식 시험은 교육을 입시 위주로 치닫게 한다. 교육을 망치는 길이다. ‘수학 능력’ 측정에 걸맞게 잠재력을 평가하려면 절대평가를 해야 한다. 등급도 9등급에서 3등급으로 줄여야 한다. 수능 다양화도 방법이다. 해외에 사례가 있다. 수능이 여러 개 있으면 줄 세우기가 쉽지 않다.

-그렇게 되면 변별력을 상실할 텐데.

△수능의 입시 영향력을 줄이면 된다. 그러자면 정부가 주도해서는 안 된다. 평가원이 출제하지만 사실상 키는 교육 당국이 쥐고 있다. 수능은 대학이 학생을 선발할 때 필요한 최소한의 정보로만 활용해야 한다.


-결국에는 대학의 학생선발 자율권을 보장해야 한다는 말인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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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 국가의 입시 관여는 최소화하고 대학의 자율권은 최대화해야 한다. 선발과 관련한 모든 선택과 결정을 대학 스스로 하고 그 책임도 대학 스스로 지는 것이 상책이다. 모두가 만족할 제도가 없는데도 역대 정부마다 입시개편에 매달려 땜질 처방만 했다. 입시 정책자문을 4개 정부에 걸쳐 했는데 말썽이 덜 한 것은 정부의 관여가 적을 때였다.

-본고사를 부활시키자는 말로 들리는데.

△과거처럼 필답고사를 부활시키자는 의미만은 아니다. 입시를 대학 중심으로 개편하자는 것이다. 개인적으로는 심층 면접이 바람직하다고 본다. 심층면접을 해보면 자기소개서나 학생부에 기록된 내용을 확인할 수 있다. 예컨대 아무리 좋은 스펙이라도 5분 동안 꼬리에 꼬리는 무는 질문을 해보면 엉터리인지 아닌지 알게 된다. 대학이 비용이 많이 든다는 이유로, 혹은 역량 부족으로 그러지 않으니 문제가 되는 것이다.

-잦은 입시개편에 대한 비판이 높다. 왜 그런가.

△‘정무적 판단’ 때문이다. 쉽게 말하면 정치적 유불리를 따져 ‘표 관리’를 한다는 얘기다. 진영논리 측면도 있지만 득표에 도움된다면 사교육 줄이네, 고교교육 정상화네 온갖 미사여구를 다 붙여 손을 댄다. 돈 드는 것도 아닌데 마다할 이유가 없다.

정부가 수능 비중 확대를 예고하자 교사단체들이 지난해 10월31일 총선용 대입제도 개편 논의를 반대하는 퍼포먼스를 벌이고 있다. /연합뉴스정부가 수능 비중 확대를 예고하자 교사단체들이 지난해 10월31일 총선용 대입제도 개편 논의를 반대하는 퍼포먼스를 벌이고 있다. /연합뉴스


-일종의 포퓰리즘이 아닌가.

△다른 차원의 문제다. 입시에 불만이 있는 것을 알기에 조금이라도 개선하려는 욕심에서다. 개편과정에서 아무리 좋은 제도라도 표 떨어지는 방향으로는 절대 고치지 않는다. 하지만 입시는 이해관계가 복잡하게 얽혀 있다. 학생과 학부모·교사·대학 제각각이다. 국민의 35%만 찬성해도 대성공이다. 비판받더라도 그 정도의 지지를 얻는다면 적어도 10년 이상 일관성을 유지해야 한다. 백년대계라는 교육만이라도 정치적 영향에서 벗어나야 한다.

-정치 바람을 줄이려면 어떻게 해야 하나.

△정부가 중장기 교육정책에 대한 사회적 합의 기구인 국가교육위원회를 설치하려는 취지에는 공감한다. 하지만 진영논리에 사로잡혀 반대쪽 인사를 배제해서는 곤란하다. 그렇게 되면 다음 정권에서 또 달라질 것이다. 시간이 걸리더라도 치열한 논쟁을 거쳐 합의를 도출하고 일정 기간 제도를 유지하도록 구속력을 부여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래야만 정권이 바뀌어도 함부로 손대지 않을 것이다.

-사교육을 줄일 방안을 제시한다면.

△사교육비 문제의 뿌리는 경쟁에 있다. 입시 제도만의 문제는 아니다. 좋은 제도라도 경쟁이 치열하면 사교육 수요는 늘어난다. 경쟁 완화방안을 찾는 게 정답이다.

-교육부 해체론이 심심치 않게 거론되는데.

△대학의 입시 자율권을 보장한다면 굳이 교육부 같은 거대 조직을 둘 필요가 없을 것이다. 초중등 교육정책은 교육감 소관이다. 미국은 교육부가 부활했는데 그 역할이 국가 차원의 연구비 배정에 그친다. 국가교육위원회가 관련 법 통과로 설치되면 교육부 폐지를 검토해볼 만하다. /권구찬 선임기자 chans@sedaily.com

He is …

국내 교육평가 분야의 최고 권위자로 국립교육평가원장과 한국교육과정평가원장· 한국교육학회장 등을 역임했다. 노태우 정부 시절인 1980년 대말 고려대 교수로 재직하면서 문교부(현 교육부)의 용역을 받아 학력고사를 대체할 수능을 개발한 주역이다. 1942년 충북 청주에서 태어나 고려대 교육심리학과를 졸업하고 미국 피츠버그대에서 교육학 박사를 받았다.

권구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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