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9년 2월11일 이탈리아 로마 라테란 궁전. 교황 비오 11세를 대리한 P 가스파리 추기경과 이탈리아 총리 B 무솔리니가 라테란 협정을 맺었다. 골자는 상호 인정. 이탈리아는 교황에게 통일국가로 인정받는 대가로 교황청의 독립주권을 인정했다. 경복궁(0.43㎢) 정도의 면적(0.44㎢)에 인구 1,000명 남짓한 초미니 국가지만 전 세계 13억 가톨릭 신도의 정신적 지주인 바티칸시국(Vatican City State)이 라테란 조약의 결과물이다. 교황 비오 11세는 “이탈리아가 하나님에게 돌아왔고 하나님도 이탈리아로 돌아왔다”고 말했다.
이탈리아 국민들이 반긴 것도 물론이다. 교황청은 대중들이 잘 모르던 반대급부도 얻었다. 무솔리니는 현금 7억5,000만리라(13억 8,000만달러 상당)와 정부 채권 10억리라를 바티칸에 바쳤다. 교황청은 겨울에 난방도 못할 만큼의 곤궁에서 벗어났다. ‘가난한 교황청’을 의아하게 여길 수도 있겠지만 당시는 그랬다. 통일 이탈리아(1861년)를 인정하지 않고 교황령의 존속을 위해 프랑스군까지 끌어들였으나 로마를 점령(1870년)당한 후 투자사업도 줄줄이 실패하며 교황령은 파산 지경에 이르렀다. 결정적으로 이교도인 오스만제국에 대한 투자 실패로 빚더미에 앉았다.
은행의 빚 독촉에 시달리는 교황을 무솔리니는 기회로 여겼다. 사병 조직의 쿠데타로 집권(1922년)한 이래 국민의 지지를 이끌어내는 데는 성공했어도 정통성 논란에 시달려온 터. 교황의 정치적 지지로 보일 수 있는 라테란 협정 체결에 돈을 아끼지 않았다. 협정이 의회를 통해 비준된 6월, 이탈리아 정부와 교황이 반목하는 ‘로마 문제’도 완전히 풀렸다. 라테란 협정 체결 91주년을 지내오는 동안 교황청과 이탈리아는 세금과 교육 문제로 사소한 이견을 보여왔으나 효율적으로 공존해왔다.
라테란 협정은 교황청에 기사회생의 기회였던 동시에 어두운 일부이기도 하다. 조약 체결 직후부터 교황이 파시스트 독재자 무솔리니와 정치적 동맹을 맺었다는 비판이 끊이지 않았다. 더욱이 2차 세계대전을 일으키고 수많은 유대인을 학살한 히틀러의 전쟁범죄에 침묵 또는 동조했으며 마피아와 결탁했었다는 혐의도 받았다. 20세기 후반 들어 교황권을 종교적 위계질서의 정점으로 되돌리려는 경향 속에 이런 논란이 더욱 거세게 일었다. 프란시스코 교황 취임 이래 과오를 반성하려는 교회의 노력은 주목할 만하다. 종교는 믿지 않아도 프란시스코 교황은 믿을 수 있다는 얘기가 괜히 나오는 게 아닌 것 같다.
/권홍우선임기자 hongw@sedaily.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