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58년 여름, 막부 다이로(大老) 이이 나오스케는 격렬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미국과의 통상조약 체결과 쇼군 후계 선정을 자기 뜻대로 강행했다. 이에 항의하는 다이묘들은 일제히 처벌했다. 여론은 삽시간에 나빠졌다. 개방정책에는 언제나 저항세력이 있기 마련이다. 불교가 들어올 때는 격렬한 반발로 이차돈이 죽었고 성리학 도입도 우여곡절을 겪었다. 서양문물에 저항해 위정척사파가 노발대발한 것은 기억에 새롭다. 개방은 물론 힘들고 불편한 일이지만, 자기도 모르게 위정척사파가 돼 있지는 않은지 돌아볼 일이다.
막부 반대파는 조약 체결에 일왕의 칙허가 없었다는 것을 구실로 삼았다. 그러나 막부로서는 억울한 일이다. 이미 300년 가까이 대정(大政)은 막부에 위임돼왔지 않았나. 모든 정책 결정을 막부에 일임한 것은 공인된 일이었다. 그런데 문제는 방금 전 막부 로주가 교토에 올라가 칙허를 구했다는 점이었다. 긁어 부스럼이란 이런 걸 두고 하는 말일 것이다. 고메이 일왕의 강력한 반대에 막혀 끝내 조약 체결의 칙허를 얻지 못한 것을 반대파는 집요하게 물고 늘어졌다. 사실 반대파도 개방이 불가피하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이 시기만큼 외교를 정쟁에 이용한 때도 없을 것이다.
이렇게 되자 일왕이 있는 교토는 전국의 야심가들이 모여드는 곳이 됐다. 교토는 더 이상 왕과 그의 신하들이 유유자적하며 와카(和歌)나 읊는 곳이 아니라 정치적 프로파간다, 음모술수와 테러가 판치는 뜨거운 ‘정치도시’가 돼버렸다. 그런 가운데 ‘무오밀칙(戊午密勅) 사건’이 터졌다(그 해가 무오년이었다). 일왕이 조약 체결에 불만을 표하는 칙서를 막부 몰래 미토번(水戶藩)에 내린 것이다. 존왕양이론자 도쿠가와 나리아키의 번이자 일왕을 떠받드는 것으로 유명한 번이다. 원래 도쿠가와 막부는 집권하자마자 일왕과 조정을 통제하는 데 주의를 기울여왔다. 그렇게 하자면 왕과 다이묘가 직접 연결되는 것은 가장 피해야 할 일이었다. 이 때문에 칙서를 막부를 통하지 않고 다이묘에게 내리는 것은 금기사항이었다. 무오밀칙으로 막부가 발칵 뒤집힌 것도 당연했다.
막부는 우선 밀칙에 관계된 미토번 인사들을 색출해 할복을 명하거나 심지어 할복마저 허락하지 않고 참수해버렸다. 어차피 죽는데 방식이 뭐 그리 중요한가라고 할지 모르지만, 사무라이에게 할복과 다른 죽음은 차원이 다르다. 사무라이의 자부심은 죽음을 스스로 결정한다는 데서 나온다. 사무라이에게 할복 기회를 주지 않고 목을 잘라버린 것은 막부의 분노를 잘 보여준다. 그러나 당한 측에는 이를 갈 만한 치욕이었다.
막부는 미토번에 칙서를 반납하라고 압박했다. 존왕양이론의 메카인 미토번이 이를 순순히 들어줄 리 없었다. 막부는 이 사건이 도쿠가와 나리아키가 이이 나오스케를 타도하고 정권을 장악하려는 음모라고 의심했다. 3개 종실가문 중 하나인 미토번이 이 위기의 순간에 막부의 주적으로 등장한 것이다. 감히 막부에 대들지 못했던 다른 다이묘들도 미토번의 등 뒤에서 막부에 서서히 도전하기 시작했다. 역시 모든 일은 내부단속부터다.
막부 반대파 인사들 색출해 숙청
다음으로 막부는 교토를 압박했다. 감히 왕이나 공경에게는 직접 손을 대지 못하니 그 휘하에서 활동했던 자들과 그동안 반막부운동을 전개했던 ‘지사(志士)’들이 대거 체포됐다. 철저한 색출이었다. 수많은 ‘지사’들이 포박돼 수십명이 죽임을 당했다. 존왕론의 선구자 야나가와 세이간, 희대의 정치천재 하시모토 사나이도 사형당했고 요시다 쇼인도 그중 한 명이었다. 이를 일본사에서는 ‘안정(安政)의 대옥(大獄)’이라고 한다. 도쿠가와 막부 사상 최대의 정변이었다.
사실 도쿠가와 시대에는 정변과 당쟁이 드물었다. 17~18세기 당쟁이 극심했던 조선에 비하면 더욱 그랬다. 군인들이니 고매한 이념이나 학파로 갈려 당파를 만들 일이 없었다. 신분에 따라 각자의 지위가, 또 가업에 따라 각자의 직무가 결정돼 있었고, 이를 넘어서는 행위는 금기시됐다. 각자에게 이미 정해진 역할이 있는 ‘야쿠(役)의 세계’다. 또 조선·중국과 다른 점은 지배층 구성원들에게 정치적 지위와는 별도로 이미 세습자산, 즉 가산(家産)이 있었다는 것이다. 다이묘의 수십만석에서부터 하급사무라이의 몇십석에 이르기까지 그랬다. 상위층으로 갈수록 그 사람의 위신은 주로 이 가산과 그에 연동되는 사회적 랭킹에 규정되는 점이 많았다. 정치적 권력이나 지위는 물론 중요했으나 그게 전부는 아니었다. 굳이 권력투쟁이라는 모험을 하지 않더라도 자기 가문의 지위나 위신은 얼마든지 보전할 수 있었다. 이것이 아마도 도쿠가와 시대에 격렬한 당쟁이나 정변이 별로 없었던 이유 중 하나일 것이다. 그런데 대외 위기의식과 일왕의 등장이 야쿠의 규범도 흔들어버렸다.
반대파 진압에 성공한 이이 나오스케의 권력은 하늘을 찌를 듯이 보였다. 그러나 그가 일왕의 의사를 무시했다는 점, 그리고 일왕을 따르려는 수많은 ‘지사’들을 처절하게 숙청했다는 점은 그를 고립시켰다. 특히 미토번이 격렬하게 반발했다. 전 번주와 현 번주가 동시에 처벌되고, 많은 가신이 극형을 받았기 때문이다. 이미 미토번에 전달된 ‘무오밀칙’은 말 그대로 뜨거운 감자였다. 막부는 즉시 반납을 윽박질렀지만, 미토번 가신들은 벌떼처럼 들고일어났다. 수천명의 사무라이와 민중이 에도와 미토 간 가도를 봉쇄하는 사태까지 일어났다. 이들 중에는 집단으로 상서를 하는 자들도 있었고, 자기 분을 못 이겨 할복하는 자도 있었다. 그러나 언제나 그렇듯 ‘일탈자’들도 있었다. 수많은 사람이 모여드니 거리는 아연 활기를 띤 모양이다. “이곳은 실로 도회지같이 부산하다. 목욕탕·이발소가 생겨나고 술·과자 등 셀 수 없이 많은 상품이 있다.” 장기간 농성을 하니 심심했던지 스모를 하는 자도 나타났고 심지어 유녀(遊女)를 부르는 자까지 있었다. 이에 대해 “의사(義士)·의민(義民)이라 자칭하는 자들이 어찌 이리 한심한 짓을 하느냐”고 비판하는 사람도 나왔다(남량연록 南梁年錄).
분노한 18명의 사무라이, 다이로 가마 습격
긴장은 고조됐다. 1860년 3월24일. 이미 사쿠라(벚꽃)가 흐드러지고도 남을 시절에 새벽부터 때아닌 폭설이 내렸다. 기이한 일이었다. 이때 18명의 사내가 에도성 남쪽 아타고신사에서 나와 에도성으로 향하기 시작했다. 이 중 17명이 미토번 출신이었다. 이날은 다이묘들이 등성하는 날이라 구경꾼이 모여들었다. 이들은 에도성 남쪽 사쿠라다문(櫻田門)에 도착해 매복했다. 다이로 이이 나오스케의 가신들은 주군의 등성을 만류했다. 가혹한 처벌을 당한 번들이 다이로 암살을 계획하고 있다는 소문이 벌써부터 들려오던 터였다. 폭설은 경호를 방해할 것이었다. 그러나 다이로는 만류를 뿌리쳤다. 그까짓 자객들의 위협 따위에 굴복해서는 막부의 위신이 서지 않는다는 심사였을 것이다.
매복한 자객들 앞에 다이로 행렬이 모습을 드러낸 것은 오전 9시 조금 지나서였다. 눈발 속에서 불쑥 나타난 적 앞에 다이로 호위무사들은 힘을 쓰지 못했다. 눈에 젖을까 칼집을 한 겹 더 덮어놓았기 때문에 칼을 뽑는 데는 시간이 걸렸다. 그 사이 수많은 칼날이 허공을 가르며 적혈을 백설에 흩뿌렸다. 20여분간의 혈투 끝에 호위무사들이 쓰러지고 홀로 남은 다이로의 가마에 수십개의 칼날이 꽂혔다. 이어 숨을 헐떡이는 다이로를 끄집어내 목을 땄다.
흔들리는 도쿠가와 막부의 신화
백주대낮에 다이로의 모가지가 떨어졌다는 소식은 문자 그대로 경천동지였다. 막부는 무엇보다 무위(武威)로 만들어진 정권이다. 1600년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도쿠가와군이 도요토미군을 격파했고 그 후로도 압도적인 무력을 과시해온 것이 막부가 천하를 다스리는 가장 중요한 근거였다. 천명이라든가 인정이라든가 군주의 덕 같은 것은 그다음이었다. 막부는 다른 건 몰라도 무력다툼에서 결코 빈틈을 보여서는 안 된다. 그런데 불과 낭사 18명의 칼날이 쇼군을 대신하는 막부 총사령관 다이로의 목에 가 닿았다. 강철대오 도쿠가와 막부의 신화가 붕괴하는 상징적인 사건이었다.
이들은 사건 당일 뿌린 ‘참간취지문(斬奸趣旨文)’에서 이이 나오스케를 ‘천하의 거적(天下之巨賊)’ ‘국적(國賊)’으로 부르며 자기들은 하늘을 대신해 그를 죽였다(천주 天誅)고 주장했다. 일왕과 국가를 위해 간신을 처치했다는 이 상투구는 그 후로도 오랫동안 암살범들이 애용하는 논법이 됐다. 이후 일본은 1930년대 후반 군부가 정권을 장악할 때까지 테러가 빈발했다. 그리고 거의 모든 테러는 정국을 크게 변화시켰다. 어찌 보면 테러는 근대 일본정치의 상수라고 할 정도였다. 한국에서는 단기간의 해방공간을 제외하고 그전에도 그 후에도 테러가 정치의 상수가 된 적은 없다.
이제 누구의 눈에도 막부는 내리막길이었다. 메이지 유신 발발 8년 전이었다. /서울대 동양사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