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융당국에 새 국제보험회계기준(IFRS17) 시행 시기를 오는 2030년으로 늦추자고 건의했습니다. 대주주가 자본확충 부담을 떠안는 데도 한계가 있고 고금리 부채 부담이 그 어떤 나라보다 큰 한국 생명보험사들로서는 다른 탈출구가 없습니다.”
지난달 27일 서울 충무로 생명보험협회 집무실에서 만난 신용길 생명보험협회장은 “10년의 시간을 번다면 업계도 충분한 시간을 가지고 보유계약의 이차역마진을 줄이고 자본을 확충하며 충격을 최소화할 준비를 할 수 있다”며 “IFRS17 도입을 한국만 늦추면 국가 신인도가 훼손된다는 게 정부의 우려지만 약속을 지키려다 생보 산업 자체가 붕괴할 수도 있다”고 말했다. IFRS17은 원가 방식으로 산정하던 부채를 시가평가 방식으로 전환하는 것으로 기존 회계방식 대비 인식되는 부채 규모가 커지는 탓에 적정 건전성을 유지하려면 보험사들로서는 크게는 조 단위의 자본확충이 필요하다. 금융당국이 정한 로드맵에 따라 보험 업계는 2022년부터 IFRS17 방식으로 회계처리하고 부채 시가평가 방식의 신지급여력기준(K-ICS·킥스)으로 건전성을 평가받게 된다. 저금리·저성장 외에도 보험사들의 수익성이 해가 거듭될수록 악화하고 있는 또 한 가지 이유가 바로 IFRS17와 킥스다.
올해는 생보협회가 설립 70주년을 맞은 뜻깊은 해이지만 초저금리 시대의 본격화와 목전으로 다가온 재무건전성 규제 강화, 여기에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사태까지 더해지며 업계가 벼랑 끝 위기에 처한 터라 자축할 분위기도 아니다. “우선 ‘업(業)’이 살고 봐야 하지 않겠습니까. 칼자루를 쥔 것은 정부입니다. 머지않아 결단을 내려야겠지요.” 신 회장의 얼굴에 단호함이 스쳤다. /대담=홍준석 금융부장 jshong@sedaily.com
생보협회는 올해 위기 극복과 미래성장을 위한 4대 핵심사업을 꼽으면서 첫 번째 과제로 저금리, 회계제도 변화 대응을 내세웠다. 단도직입적으로 말하면 가장 시급한 과제는 IFRS17과 킥스 시행 시기를 최대한 미루는 것이다. 우선 첫 번째 고비가 다가오고 있다. 다음달 열리는 국제회계기준위원회(IASB) 이사회에서 IFRS17 도입 시기를 논의한다. 앞서 생보협회는 유럽보험협회 등과 공동으로 2022년에는 IFRS17 시행이 불가능하다는 입장문을 제출했다. 지난해 IASB에서 1년 연기가 결정되면서 한국 역시 2022년에 시행하기로 한 상태다. 그러나 IFRS17 도입 논의를 주도하고 있는 유럽마저도 예상보다 심각한 초저금리 상황에 직면하자 시행 가능 시기를 2023년으로 못 박고 나섰다. 지금 같은 분위기라면 한국만 굳이 속도를 낼 이유가 없다는 게 신 회장의 판단이다. 특히 그가 우려하는 상황은 대한민국이 ‘마이너스 금리’ 시대에 예상보다 일찍 진입할 수 있다는 점이다. 신 회장은 “유럽은 지난 2016년 부채 시가평가 방식의 지급여력 제도인 솔벤시Ⅱ(SolvencyⅡ)를 도입하면서 16년의 긴 경과기간을 거쳤고 IFRS17에 대해서도 단계적 도입 입장을 고수하고 있다”며 “과거에 판매한 고금리 계약 비중이 높은 한국 보험사들은 국채 수익률이 마이너스로 돌아선다면 IFRS17 도입 준비는커녕 생존조차 불가능해진다”고 경고했다. 그가 당국에 IFRS17 도입 시기를 2030년으로 연기할 것을 건의한 이유도 여기 있다. 신 회장은 “생보사의 자본확충 부담을 단기간에 키우는 제도인 만큼 1~2년 미룰 것이 아니라 10년 이상의 경과기간을 확보해야 한다”며 “10년의 로드맵을 가지고 각사가 일정 비율씩 자본을 쌓아갈 수 있도록 한다면 충분히 이 위기를 극복할 수 있다”고 피력했다.
물론 예정된 2022년부터 IFRS17과 킥스가 도입될 것에 대비한 완충장치 마련도 시급하다. 4월 도입 예정인 공동재보험 제도도 일종의 완충장치다. 공동재보험이란 금리 변동에 대한 리스크를 재보험사에 이전하는 제도로 보험사의 역마진과 자본확충 부담이 완화될 것으로 기대된다. 신 회장은 “국내 생보사의 고금리 부채구조를 단기간에 해소하기 어렵다는 점을 당국에 지속적으로 피력했다”며 “금리가 추가로 하락한다면 생보사의 재무적 영향이 큰 만큼 이를 최소화할 수 있는 안전장치 마련이 필수적”이라고 강조했다.
최근 정무위원회 법안심사소위원회 가결로 국회 통과의 물꼬를 튼 보험사의 해외투자 한도 확대도 초저금리 국면에서 생존위기에 내몰린 업계가 내세운 숙원과제였다. 생명보험은 계약기간이 수십년에 달하는 장기상품이라 보험사들은 장기채권 중심의 자산운용으로 자산과 부채를 관리해야 하지만 국내에는 20·30년 이상의 장기국채 발행이 거의 없어 해외 국채 투자가 불가피하다. 특히 1%대 저금리 시대로 접어들며 비교적 금리 수준이 높은 해외 채권 투자가 절실하지만 보험사의 해외투자 한도는 30%로 제한돼 있다. 이 때문에 한도를 꽉 채운 상당수 보험사는 규제 완화를 적극 건의해왔다. 신 회장은 “정무위 전체회의, 국회 본회의 등의 의결 절차까지 무사히 통과해 20대 국회 임기 내에 최종 처리되기를 고대하고 있다”며 “법안 통과로 투자 한도가 50%까지 늘어나면 보험사들이 자산운용수익률을 높일 수 있을 뿐만 아니라 해외 장기 자산투자를 통해 듀레이션갭(자산과 부채의 만기 차이)을 줄일 수 있어 IFRS17·킥스에도 효과적으로 대비할 수 있을 것”이라고 내다봤다.
보험업 전반이 성장 정체에 빠졌지만 경쟁은 과거보다 치열해졌다. 24개 생보사 외에도 장기보험을 판매하는 손해보험사들까지 합치면 40여개의 보험사가 같은 시장을 두고 치열한 파이 싸움을 벌이고 있다. 그러나 한국은 가구당 보험가입률이 86%에 달할 정도로 성숙기에 도달한 시장이다. 결국 새로운 수익원을 창출하지 못한다면 생존이 불가능하다는 얘기다. 신 회장이 새로운 먹거리 창출을 위한 제도 손질에 앞장서고 있는 것도 이 때문이다. 신 회장은 “지금 생보 업계가 처한 위기는 개별 회사의 경쟁력 저하에서 원인을 찾기보다는 재무건전성 규제 강화에 따른 자본확충 부담과 해외 투자자본의 자금회수와 관련성이 높다”며 “저금리·저성장·저출산·고령화 속에서도 산업을 살리고 육성하기 위한 중장기적 대책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데이터 3법 통과로 데이터 금융 상품과 서비스가 탄생하는 초석이 마련됐다고 떠들썩하지만 보험 업계로서는 아직 아쉬운 게 많다. 의료계의 반발로 의료데이터를 수집하는 데는 여전히 제약이 크다. 신 회장은 “보험 상품의 특성상 의료데이터와의 결합으로 다양한 혁신형 상품과 서비스를 만들어낼 수 있는데 지금으로서는 데이터 접근이 완전히 차단됐다”며 “올 3·4분기 의료데이터 활용 가이드라인 제정을 앞두고 있는데 국내 의료계가 전향적인 태도를 보이지 않는 이상 혁신적인 건강보험 상품을 선보이기 어렵다”고 꼬집었다.
‘건강증진형 보험 상품 개발·판매 가이드라인’ 제정으로 보험사의 헬스케어 부수업무와 자회사 설립이 허용됐지만 보험사들이 고객 맞춤형 헬스케어 서비스를 제공하고 또 보험 할인 서비스를 제공하기 위해서는 건강·질병 정보와의 결합이 필수적이다. 그러나 이 역시 의료계의 반대로 막혀 있는데다 보험사의 헬스케어 서비스를 의료행위로 간주할 소지가 있어 의료법 개정도 선행돼야 한다. 신 회장은 “급속한 고령화로 질병 예방 차원의 헬스케어 서비스 수요가 증가하고 있어 보험사들도 사후 보상 중심에서 사전 예방 중심의 서비스 준비에 나서야 한다”며 “의료계와 시민단체들은 건강·질병 정보가 고객 동의 외의 목적으로 오·남용될 수 있다고 주장하지만 고객 동의하에 민감정보를 활용하면 된다. 최소한 비식별 정보라도 활용할 수 있게 길을 열어줘야 한다”고 말했다.
당국을 향해서도 직언을 아끼지 않는 신 회장이 신념을 굽히지 않는 또 한 가지 문제가 보험설계사에 대한 노동3권 부여 문제다. 정부는 특수직종사자의 사회보험 적용 확대와 노동법적 보호를 정부의 5개년 100대 국정과제로 선정하고 관련 입법을 추진하고 있다. 특수직종사자의 노동자 지위 인정 여부가 보험 업계에 첨예한 이슈인 것은 약 80만명의 특수직종사자 중 절반인 40만명이 설계사들이기 때문이다. 신 회장은 “개인사업자 신분인 설계사들에게 노동3권을 부여할 경우 보험사들이 부담해야 하는 비용은 1조3,000억원에 달한다는 연구 결과가 있다”며 “오히려 저성과 설계자들의 일자리가 불안해질까 우려스럽다”고 말했다. 노동3권을 보장하지 않더라도 설계사에 대한 보호장치를 강화할 방법은 얼마든지 있다는 게 신 회장의 주장이다. 신 회장은 “직종별 개별법률에서 불공정 계약이나 불합리한 계약 해지, 구매 강요 등을 근절하는 보호 방안을 마련하면 된다”고 설명했다.
생보 업계가 만난 또 한 가지의 암초는 보험에 대한 신뢰 저하다. 불완전판매와 보험설계사의 잦은 이직에 따른 고아계약 양산 등이 대표적인 이유다. 특히 제조·판매 분리 흐름 속에 급성장한 법인보험대리점(GA)에 대한 감독 강화와 자정활동이 시급해졌다. 신 회장은 “소비자의 선택권 보장을 위해 탄생한 GA가 수수료를 많이 받는 상품 위주로 계약을 유치하고 단기실적에 연연하면서 보험에 대한 불신을 자초했다”며 “불완전판매에 대해 GA도 책임지는 법적 근거가 마련되지 않으면 GA 업계의 혼탁영업을 근절할 수 없을 것”이라고 지적했다. 그나마 다행스러운 점은 신 회장이 적극 추진했던 모집수수료상한제(초년도 수수료를 1,200%로 제한)와 분할지급제가 내년 1월부터 시행된다는 점이다. 신 회장은 “선급과 분급을 선택할 수 있도록 한 점에서 100% 분급제로 전환하지 못한 점은 다소 아쉽지만 하루 빨리 분급 제도가 정착돼 소비자 중심의 영업문화를 확산하는 계기가 되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약력
△1952년 충남 천안 △1976년 서울대 독어독문학과 졸업 △1990년 미국 조지아주립대 재무학 박사 △2002~2006년 교보자동차보험 사장 △2008~2013년 교보생명 사장 △2011~2013년 금융발전심의회 위원 △2015~2017년 KB생명 사장 △2017년~ 제34대 생명보험협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