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52년 3월4일 프리드리히 1세(30세)가 독일 왕좌에 올랐다. 콘라트 3세의 임종을 지킨 대주교가 ‘선왕이 아들 하인리히(6세)를 제치고 조카인 슈바벤 공작 프리드리히를 후계자로 지목했다’고 주장한 덕분이다. 게르만족의 전통에 따라 귀족 선거로 6일 뒤 왕위 계승의 정통성을 인정받은 프리드리히 1세는 왕권 강화에 나섰다. 주 공략 대상은 이탈리아. 수많은 봉건 제후와 도시국가들이 도사리는 독일 지역보다 북이탈리아를 골랐다. 교황을 견제할 수 있는 이탈리아를 잡아야 왕권이 안정된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이탈리아 원정에서 이렇다 할 전과는 못 올렸어도 그는 1154년 ‘이탈리아의 왕’이라는 칭호를 받았다. 세력 확장에 목매는 그의 정벌 대상이 되지 않으려는 교황과 북부 이탈리아의 제후들, 도시국가들은 그의 지배권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1년 뒤인 1155년 독일과 이탈리아의 유력 제후들은 그를 신성로마제국의 황제로 뽑았다. 황제 프리드리히 1세는 신성로마제국을 샤를마뉴와 오토 1세 시절로 되돌리려고 애썼다. 아이를 낳지 못하는 세 살 아래 첫째 부인과 이혼하고 36세 나이에 부르고뉴의 상속자인 어린 신부(13세)를 맞아들여 프랑스 남서부의 드넓은 땅도 챙겼다.
인생의 정점은 1184년(62세). 십자군 원정을 준비하면서 전 유럽의 기사를 마인츠에 불러 베풀었던 만찬에서 기사와 시종 등 7만여명이 ‘프리드리히’를 환호할 때는 유럽이 프리드리히 이름 아래 통일된 것 같았다고 한다. 이탈리아 원정 여섯 차례와 동쪽으로 게르만족의 영역을 넓힌 그는 ‘기사의 모범’으로도 통했다. 건장한 체격에 뛰어난 검술과 언변, 붉고 멋진 수염(이탈리아어로 바르바로사(Barbarossa)), 겸손한 태도와 예의범절로 기사들의 마음을 사로잡아 3차 십자군 출정에서는 무려 10만여 병력을 모았다. 강가에서 갑작스레 사망(68세)한 아쉬움이 컸기에 독일인들은 그를 특이하게 기억한다.
독일의 신성한 산 어딘가에 잠든 프리드리히 1세와 그의 기사들이 때가 되면 깨어나 독일의 적들을 말끔히 무찌르고 대제국을 완성한다는 전설이 퍼졌다. 히틀러가 갑작스레 소련을 침공(1941년)하면서 붙인 작전명이 ‘바르바로사’였다. ‘프리드리히’라는 이름의 독일 출신 황제와 왕·제후가 너무 많아 ‘프리드리히 바르바로사’로 통하는 그는 평생 제국다운 신성로마제국을 꿈꿨다. 볼테르는 “신성하지도 않고 로마와 닮지도 않았으며 제국도 아니었다”고 비꼬았지만 신성로마제국의 꿈은 아직도 게르만의 어느 구석에 숨어 있을지도 모른다.
/권홍우선임기자 hongw@sedaily.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