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년 12월27일 서울 을지로 기업은행(024110) 본관 대강당. 조준희 당시 IBK기업은행장은 “상주 촌놈이 은행장까지 해봤으면 출세한 것”이라고 소탈하게 웃으며 연단을 내려왔다. 당시 행사에 참석했던 직원들은 그가 이임사 중에 유명을 달리한 직원들의 이름을 일일이 부르다가 말을 잇지 못하고 눈물을 흘렸던 모습을 아직도 잊지 못한다고 한다. 그는 기업은행 50년 역사 최초로 공채 출신 은행장에 올랐다. 그는 재임 기간에 기업은행의 총자산을 163조원에서 260조원으로 늘리며 성장 기반을 다졌으며 중소기업 대출 금리 인하, 문화콘텐츠 및 IP금융 지원 등 미래 성장동력을 구축한 리더로 평가된다.
그로부터 3년여가 지난 2017년 12월 뜻밖의 소식이 들려왔다. 그가 이름도 낯선 중소기업의 회장을 맡기로 했다는 것이다. 당시 서울경제와의 인터뷰에서 “큰 기업에 고문 같은 것으로 가서 여생을 편안하게 살 수도 있지만 우리 사회의 많은 고위직이 꼭 그렇게 해야만 하는 것은 아니다. 조그만 기업에 가서 내 능력을 발휘해 세계 시장에서 통하는 기업으로 키우겠다”고 각오를 밝혔던 그를 5일 경기도 시흥시 시화공단에 자리한 송산특수엘리베이터 본사에서 만났다.
그는 “중소기업 현장에서 직접 몸으로 부딪혀보니 기술만이 살길이라는 신념이 더욱 강해졌다”며 “정부가 중소기업 지원을 위해 애쓰고 있지만 특정 분야에서 세계 1등의 히든챔피언을 키우려면 정부도 선택과 집중에 힘써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는 “중소기업들은 아무리 좋은 제품을 만들어도 국내 시장에서는 외면받기 일쑤”라며 “오히려 해외에서 기술을 먼저 알아보고 사주면 이를 바탕으로 레퍼런스(실적)가 만들어져 국내에서 영업이 성사되는 비정상적인 구조”라고 지적했다. 좋은 기술, 좋은 제품은 정부가 우선 구매해주고 이렇게 쌓인 레퍼런스를 바탕으로 중소기업이 시장을 개척할 수 있도록 총력 지원해야 한다는 얘기다.
-친정 얘기부터 하자. 조 회장이 기업은행 최초의 공채 출신 행장 기록을 세운 뒤 권선주 전 행장, 김도진 전 행장까지 3연속 내부 출신이었다가 윤종원 전 청와대 경제수석이 최근 행장에 취임하면서 갈등을 겪었는데.
△기업은행 창사 50년 만에 공채 출신 은행장에 올랐을 때 선후배 동료들이 무척 기뻐했다. 그 뒤 10년 가까운 세월 동안 내부 출신이 행장에 오르는 전통을 이어갔다. (공채 출신인 내가) 이러한 전통이 계속되는 것을 바라는 것은 인지상정이 아니겠는가. 조직이든, 국가든 뭔가를 지키는 게 어렵다는 사실을 새삼 깨닫는다. 따지고 보면 우리 스스로 부족해 자초한 면도 적지 않다. 언젠가 후배 가운데 유능한 친구가 나와 다시 공채 출신이 행장에 오르는 전통이 이어지기를 기대한다.
-재직 당시 중소기업 대출금리를 획기적으로 낮추며 중소기업은행으로 거듭났다는 평가를 받았는데.
△기업은행이 중소기업을 위한 은행이라고 늘 강조했지만 정작 어려운 중소기업들은 재무구조가 좋지 않아 비싼 이자를 치르면서 대출을 받아야 했다. 어려운 중소기업에 한 푼이라도 싼 금리로 도움을 드려야 하는데 이를 위해서는 자금을 싸게 조달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춰야 했다. 하지만 당시만 해도 기업은행은 기업만 거래하는 은행이라는 인식이 강해 개인 고객의 예금 규모가 작은 편이었다. 기업은행이 태생적으로 가진 문제였다. 자금 조달이라는 원초적인 문제를 해결하지 않고는 은행의 미래는 물론 중소기업 지원이라는 소명도 실천할 수 없었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 송해 선생님을 광고 모델로 내세워 ‘국민 모두가 거래할 수 있는 은행’이라는 이미지를 홍보했고, 광고 전 40만명 수준이던 신규 고객이 100만명까지 급증하며 대규모 자금을 조달할 수 있는 발판이 마련됐다. 충분한 자금을 조달한 만큼 금리도 대폭 낮출 수 있었다. 은행장 취임 당시 개인 대출 최고금리가 연 18%, 기업 대출 최고금리는 연 17% 정도였는데 퇴임 직전 모두 연 9.5% 수준까지 낮췄다. 당시 일부 시중은행의 대출 금리가 20% 안팎이었으니 절반도 안 되는 수준이었던 셈이다.
-송산특수엘리베이터가 일반인에게는 생소한 회사인데, 어떻게 인연이 맺어졌는가.
△우리나라는 국제통화기금(IMF) 사태 당시 수많은 기업을 잃었다. 그중에는 세계적인 기술력을 갖춘 곳이 적지 않았다. 개인적으로는 종자와 승강기 분야에서 중요한 자산을 잃었다고 생각한다. 서울종묘와 흥농종묘 등 종자업체들과 동양엘리베이터·LG산전 등 승강기 업체들이 잇따라 외국계 기업에 인수됐다. 진심으로 안타까웠기 때문에 언젠가는 종자 주권과 승강기 주권을 되찾아야 한다는 말을 자주 했다. 때마침 YTN의 강소기업 프로그램에 송산특수엘리베이터가 방영됐고, 기업인들과의 모임에서 김기영 대표와 얘기를 나누면서 인연이 닿았다. 내가 자연인으로 돌아간 후에는 김 대표가 여러 번 (송산에 와서) 도와달라고 요청했다. 김 대표 본인 말로는 삼고초려가 아니라 ‘이백고초려’를 했다고 하더라(웃음).
-송산특수엘리베이터에서 반드시 이루고 싶은 목표는.
△1980년 행원으로 시작해 33년5개월 동안 중소기업 지원이라는 외길만 걸었다. 이제는 내가 가진 능력을 100%, 120% 발휘해 세계 시장에서 통하는 1등 기업을 만들고 싶다. 김 대표와도 10년 이내 세계 최고의 1등 기업을 만들어보자고 의기투합했다. 지금도 그 목표를 향해 가고 있는데, 골리앗엘리베이터의 경우 어느 정도 기반을 닦았다는 평가다. 골리앗엘리베이터는 세계 최초, 세계 최대 산업용 엘리베이터다. 최대 500인승, 최대 운행거리 500m를 자랑하는데 대규모 인원을 이동시킬 뿐 아니라 중장비까지 운송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이미 삼성디스플레이·삼성중공업·LG디스플레이·현대중공업 등 전기·전자·반도체 산업 현장에 적용됐다. 최근 개발이 완료된 ‘엑스베이터’는 송산의 기술력이 집약된 혁신 제품이다. 비상구난용 엘리베이터로 화재가 발생해도 유해가스와 화염의 유입을 차단하는 한편 전력 공급이 끊어져도 비상전력으로 운행할 수 있는 세계 유일무이한 기술이다. 이는 김 대표가 엔지니어 출신으로 승강기 분야에서 수십년간 근무한 이력이 있어 가능하다. (김 대표는 외국계 엘리베이터 회사 오티스에 입사해 아시아태평양 지역 연구개발(R&D) 이사까지 지냈다) 이에 힘입어 매출이 2018년 120억원 안팎에서 지난해 350억원, 올해는 (보수적으로 잡아도) 500억원을 넘어설 것으로 예상한다. 매출의 절반 이상을 해외에서 거두고 있으며 영업이익률 역시 웬만한 제조업체보다 높다. 이런 추세로 가면 2~3년 이내에 기업공개(IPO)를 하려는 계획도 차질 없이 진행될 것으로 판단한다.
-중소기업에 몸담은 지 2년이 넘었다. 현장에서 느끼는 가장 큰 고충은 무엇인가.
△중소기업 현장에 와 보니 정부가 중소기업에 해주는 정책적 지원이 많기는 하다. 그런데 정작 중요한 것은 모든 기업에 골고루 지원하기보다는 각 분야에서 1등 기업을 키우는 게 아닌가 싶다. 정부가 독보적인 기술력을 가진 기업을 물심양면 키워가면서 성공 사례들을 만들어야 한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사태만 놓고 봐도 글로벌 공급망이 무너지니 대한민국 산업 전체가 영향을 받는 게 아닌가. 우리가 핵심 산업 분야에서 탄탄한 기술을 확보하고 있으면 그 어떤 외풍에도 덜 휘둘린다. 그동안 자금을 중심으로 정책 지원이 이뤄졌는데 기술력이 있고, 재무구조가 튼실한 기업들의 경우 굳이 정부 자금을 받을 필요가 없다. 이들 기업은 자금 지원보다는 확실한 구매처가 더 절실하다. 기술력이 검증된 제품을 정부가 우선 구매해주고, 이러한 구매 레퍼런스를 바탕으로 국내외에서 영업할 수 있게 해야 한다. 이렇게 되면 기업들도 당연히 기술개발에 전력을 쏟을 것이다. 좋은 제품을 만들어야 정부가 사주고, 이를 바탕으로 판매망이 확보된다는 믿음이 생기기 때문이다. 하지만 여전히 공공 부문의 구매 관행은 보수적으로 운용되고 있는데다 최저가 낙찰 방식으로 진행되는 경우도 적지 않아 좋은 품질의 제품을 납품하기 어려운 구조다.
-최저임금 인상과 주 52시간 근로제로 인해 중소기업 현장의 어려움이 적지 않은데.
△최저임금제나 주 52시간제는 세계적인 흐름이고, 또 그렇게 가는 게 맞다. 하지만 세심하게 현실을 고려해야 한다. 국내가 아닌 세계 시장에서 치열하게 경쟁하고 있는데 노동환경 개선만 신경 쓰면 개별 기업의 경쟁력은 어떻게 되겠는가. 우리가 나아갈 방향이지만 공론화하면서 완급을 조절해야 한다. 우리 회사가 자리한 시화공단만 해도 대부분의 제조업체가 힘들다고 아우성이다. 우리나라 산업 생태계는 반월시화공단·남동공단·부산녹산공단 등 공단에 자리한 중소 제조업체들이 지탱하고 있는데 이들이 무너지면 대한민국 경제의 근간이 흔들릴 수 있다는 점을 명심했으면 한다. 정민정 논설위원 jminj@sedaily.com
He is
1954년 경북 상주에서 태어나 한국외국어대 중국어과를 졸업한 뒤 지난 1980년 기업은행에 입행했다. 도쿄지점장·종합기획부장·개인고객본부장·수석부행장 등을 거쳐 2010년 기업은행 50년 역사 최초로 공채 출신 은행장에 올랐다. 2015년 3월부터 2017년 5월까지 보도전문채널 YTN 대표이사를 지냈으며 2018년 1월부터 송산특수엘리베이터 회장을 맡아 해외 시장 개척에 힘을 쏟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