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피(식품)계의 ‘에르메스’가 되겠습니다.”
너무 당당해서 어쩌면 당돌하다 싶기까지 한 그의 주문(呪文)은 인터뷰 동안 몇 번이나 나왔다. 조금 거창한 것 아닌가 하는 생각 한편에서는 김용덕 테라로사 대표가 그리는 미래가 무엇인지 궁금증이 일어났다. 그도 그럴 것이 스타벅스가 국내에 들어온 지 3년 차인 지난 2002년, 이제 막 일부 직장인과 대학생들이 아메리카노의 매력에 빠질 그 무렵에 마치 와인처럼 지역과 환경에 따라 원두 특유의 맛과 향을 지닌 스페셜티 커피를 들고 나온 사람이 바로 김 대표다.
김 대표를 6일 테라로사 광화문점에서 만났다. 예순이 넘은 나이에 군살 하나 없는 날렵함. 캔버스화를 신은 그는 테이블에 직접 올라가 벽 한쪽 책장 인테리어를 다듬고 있었다. 매 계절에 어울리는 생화가 흐드러지게 피는 이 공간은 김 대표의 손끝에서 나왔다.
◇밤 10시 은행 월 마감을 끝내고=‘조한제상서.’ 1990년대 가장 잘나가던 은행 서열이다. 조흥·한일·제일·상업·서울은행. 그는 조흥은행에서 20년을 일했다. 복잡한 대출 업무에 빠삭했고 성실한 은행원이었다. 은행에서 인정받았고 특별한 잘못만 없으면 지점장 정도는 당연히 갈 수 있는 시기였다. 그러나 1997년 외환위기가 터졌고 그는 1호로 명예퇴직을 신청했다. 어떤 특별한 이유나 꿈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그저 막연한 가슴 속 열망이었다. ‘한번쯤은 다른 것을 도전해볼 수 있지 않을까.’ 오후10시까지 은행에서 가장 바쁜 월 마감 업무가 끝나자마자 사표를 냈다. 누구와 상의하지 않았기에 말릴 틈도 없었다.
“그렇게 강원도 속초에 돈가스집을 냈습니다. 자영업자로서의 시작이었죠. 자영업자로 겪는 모든 시행착오를 이해합니다. 왜냐하면 다 겪어봤으니까요.”
돈가스집 성적은 보통이었다. 별 준비 없이 뛰어든 자영업은 녹록지 않았다. 주방장 등 직원을 관리하는 것부터 음식의 맛까지, 넘어야 할 산들이 보였다. 자영업자로서 겪는 모든 고충을 경험했다. 손님이 뜸해서 기다려봤고, 적자에 허덕였고, 부도 위기도 두 번이나 있었다. 그때 깨달은 것은 좋은 재료를 쓰고 진심을 다하면 언젠가는 ‘핫’해진다는 것.
그러다 당시 가장 핫하다는 서울 청담동 레스토랑을 돌았다. 그때 후식으로 나온 커피, 잊을 수 없었다. 지금까지 자신이 했던 음식과 커피는 ‘장난’이었음을 느끼는 첫 순간이었다.
당시 한국은 커피 맛의 불모지였다. 그는 2002년 강릉에 커피 볶는 공장을 열었다. 커피에 미쳐갔다. 자신이 이렇게 열정적인 사람인지도 커피를 통해서 알게 됐다. 당시 커피는 대부분 몇 곳 대기업에 의존하던 시기여서 좋은 커피 생두를 수입해 국내에서 볶는 김 대표의 커피 공장은 금방 입소문을 탔다. 첫 원두 납품처는 그에게 커피와 음식의 세계에 문화적 충격을 줬던 청담동 ‘안나비니’ 레스토랑이었다. 이후 특급호텔 등에서도 납품 주문이 이어졌다. 브라질어로 커피가 잘 자라는 ‘붉은 땅’, 그래서 희망 있는 땅이라는 의미의 테라로사. 강릉시 구정면의 이 커피 공장 겸 카페는 그 무렵부터 커피 애호가를 사이에서 입소문이 났다.◇2008년 어느 새벽=한국에서 커피 생두를 잘 만지는 공장으로 유명세를 탈 무렵 커피의 근본에 대한 궁금증이 밀려왔다. “세계에서 커피를 가장 잘 만든다는 곳은 어떤 맛을 낼까. 미국 3대 커피로 손꼽히는 인텔리젠시아 커피 본사를 무작정 찾아갔습니다.” 2008년 어느 날 시카고에서 마신 인텔리젠시아 커피는 또 한번의 문화적 충격이었다.
“다음날 밀레니엄파크 옆 인텔리젠시아 커피 매장이 오전9시에 문을 여는데 새벽 5시 반부터 주위를 서성이다 첫 손님이 됐습니다. 정말 등골이 오싹했어요. 한숨을 못 잤습니다. 지금껏 만든 커피에 부끄러워서.” 그는 그때부터 세계 곳곳의 커피 농장과 공장을 찾았다. 독서광인 그는 닥치는 대로 읽었고, 마셨고, 공부하고 또 공부했다.
테라로사는 매년 직원들을 해외연수를 보내는 것으로도 유명하다. 브라질과 에티오피아 커피 농장, 가장 최근에는 프랑스에서 유명 카페와 미술관을 가보게 했다. 김 대표가 매년 해외연수를 준비하는 것은 그가 2008년 느꼈던 충격과 가슴 뛰는 일을 만날 기회를 직원들에게도 주고 싶다는 이유에서다.
◇공간도 맛있는 곳=테라로사 매장의 문을 열고 들어가면 다른 카페와는 뭔가 공간과 분위기가 다르다고 느끼게 된다. 그건 김 대표의 철학 때문이다.
“커피 장사보다는 문화가 되고 싶습니다. 공간 자체에 철학이 반영되면 이 공간을 찾은 고객들은 잠시라도 ‘힐링’을 느낍니다.”
강릉 테라로사는 미술관 같은 커피 공장이다. 에티오피아 국기에서 따온 색상으로 벽면을 채우고 세계 각국에서 모은 구형 그라인더, 각종 연장 등은 ‘공장’이라는 단어를 무색하게 한다. 테라로사는 천편일률적인 매장이 없다. 부산 수영점은 고려제강에서 먼저 연락이 왔다. 그의 강릉 공장을 두 번이나 방문한 송영철 고려제강 회장이 그에게 인테리어를 맡겼다. 공장터라는 데 착안해 오래된 철판으로 커피바와 테이블을 만들었다.
포스코에서도 서울 대치동 포스코센터 로비에 ‘포스코다운’ 매장을 내달라는 의뢰가 왔다. 1층 높이가 6m가 넘고 2층도 4m 정도가 되는 압도적인 공간을 그 자리에서 연필 한 자루로 집중해 설계하고 그 자리에서 ‘오케이 사인’을 받았다. 독학으로 공부한 설계와 건축을 이제는 유수의 기업이 먼저 알아보고 있다.
◇日 스페셜티 대부로부터 받은 e메일=테라로사는 세계 커피 애호가들에게 한국의 작지만 강한 회사로 통한다. 지난 연말에는 일본 스페셜티 커피의 대부로 꼽히는 하야시 히데타카씨에게 한 통의 e메일을 받았다. ‘커피 업계의 별이 돼줘 감사하다’는 내용이었다.
글로벌에서 테라로사에 보내는 관심이 커졌다. 테라로사는 해외 농장에 커피를 사러 갈 때 ‘체류에 대한 모든 비용은 테라로사가 스스로 지불한다’는 원칙을 지킨다. 남미의 커피 농장에서 한 해 몇십억원어치 원두를 사는 그는 그야말로 슈퍼 바이어다. 커피 농장들은 ‘갑 중의 갑’으로 통하는 해외 바이어를 최고급으로 접대하고는 한다.
그는 “테라로사는 다르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어서 호텔부터 렌터카 비용까지 스스로 부담하는데 글로벌 커피 업계에서 ‘이런 회사는 처음 본다’고 오히려 의아한 반응을 보인다”며 “투명하다는 회사의 정신을 보여주고 싶었는데 오히려 이런 관행이 광고가 됐다”고 웃었다.
그의 꿈, 커피계를 넘어 식품계의 에르메스가 되는 것. 그는 “테라로사에서 커피 한잔을 마시고 음식을 먹는 것으로 행복감을 느끼고, 먹고 마셔서 살아 있는 게 행복하다는 것을 느끼는 공간을 만들고 싶다”고 했다.
“네슬레는 세계 1위의 커피 식품회사지만 본사가 있는 스위스는 커피가 한 톨도 나지 않는 곳입니다. 세계 3대 철강회사인 포스코의 시가총액이 20조원 안팎인데 스타벅스 글로벌의 시총은 130조원입니다. 한국도 식품 업계에서 철학이 있는 글로벌 기업이 나와야 합니다. 철학이 있어야 글로벌에서 먼저 알아봅니다. 테라로사도 ‘파리의 한국에서 온 카페’와 같은 작은 시도로 끊임없이 도전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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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0년 경남 진해 △1978년 강릉상고 △1977~1998년 조흥은행 근무 △2002년 테라로사 1호점 설립 △2016년 커피박물관 테라로사 뮤지엄 개관, 부산 수영구 소재 복합문화공간인 F1963에 열한 번째 테라로사 설립 △2018년 테라로사 포스코점 설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