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의 조세제도는 토지에 부과되는 전세(田稅)와 노동력을 제공하는 역, 집집마다 부과되는 공납으로 이뤄져 있었다. 그중에서도 공물은 경제력에 상관없이 일관되기 부과했기에 농민들을 힘들게 했다. 할당된 공물을 구하기도 어려웠고 대신 납부하고 폭리를 취하는 방납이 성행하는 등 중간 수탈이 심각했다. 지방 관료를 거쳐 우의정에 오른 김육(1580~1658)은 ‘대동법’을 주장했다. 그보다 앞서 16세기 말에 이이나 유성룡 등이 ‘토지 1결당 쌀 1두를 거두자’고 제안했던 터다. 공납제의 폐단이 심각했던 경기도에서 맨 먼저 대동법이 시행됐다.
대동법은 토지 면적에 비례해 쌀 또는 면포로 징수했기에 투명한 조세였지만 농지에 부과되는 것이라 지주들의 반발이 거셌다. 김육은 충청감사로 재직하며 ‘충청도 대동법’을 건의했지만 중앙정부 관리들의 극렬한 반대로 좌절된 바 있다. 우의정이 되고서야 김육은 “실로 시대를 구할 수 있는 좋은 계책”이라며 다시금 ‘대동법’을 들고 나왔다. 반대파 관리들은 국가 세입표부터 개정해야 하는데다, 대동법을 시행해도 잡세가 줄지 않을 것이라며 발목을 잡았다. 이들을 등에 업은 부호들도 반대했다. 이에 김육이 “삼남(三南·한반도 남쪽의 경상도·전라도·충청도를 아우른 말)에는 부호가 많아 이 법의 시행을 부호들이 좋아하지 않는 것”이라며 내뱉은 일침은 지금 들어도 따끔하다.
한국사 교과서에 한두 줄 정도로만 등장하는 개혁가 김육의 이름을 기억하는 이도 있겠으나 모르는 사람도 태반일 것이다. 한국 경제사를 연구한 저자 이헌창 고려대 교수는 조선시대 최대의 정책 업적을 거둔 인물로 세종, 유성룡과 함께 김육을 꼽는다. 신간 ‘김육 평전’은 숱한 업적에도 불구하고 역사적 조명을 덜 받은 김육의 생애를 집중적으로 파헤쳤다.
김육은 대동법 외에도 동전 유통을 주장해 17~18세기 경제성장의 기틀을 닦았다. 서양 역법인 시헌력의 도입을 주도했고 국가재정 확보를 위한 은광 개발, 수레 사용과 교육 보급을 건의하고 군정과 국방에 대한 정책을 제시했다.
하지만 실리적인 김육과 명분 싸움으로 번번이 맞서던 김집의 제자 송시열 등이 정국을 주도하면서 김육은 배향공신(종묘에 왕과 함께 모시는 공신)에 들지 못했다. 역사학자인 저자는 “오늘날 한국처럼 국가적 발전의 난관에 직면하여 그것을 타개할 제도 개혁을 강인하게 추구할 정치가를 구한다면, 김육을 불러오고 싶다”면서 오늘날 관료와 정치가의 모범으로 김육을 소개했다. 3만2,000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