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오늘의 경제소사] 죽음의 바탄 행진

1942년 일본군의 포로 학살




1942년 4월9일 필리핀 바탄반도 남단 마리벨레스. 사령관 맥아더 장군이 빠져나간 뒤에도 항전하던 미군과 필리핀군 7만6,000명이 백기를 들었다. 일본군 수뇌부는 이들을 120㎞ 떨어진 오도널 수용소로 이송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기진맥진한 상태에서 행군에 나선 미군에 일본군은 인간 이하의 짓을 저질렀다. 음식과 물을 주지도 않고 낙오자는 실탄이 아깝다며 총검으로 죽였다. 열차로 이동한 구간에서도 다수의 포로가 죽어 나갔다. 환기가 안 돼 실내온도가 43도에 이르는 화차에 많은 인원을 욱여넣어 질식사한 것이다.


결국 목적지에 도착했을 때 포로는 5만4,000여명으로 줄어들었다. 포로 2만2,000여명이 이송 과정에서 구타와 굶주림, 말라리아, 총검에 찔려 죽었다. 포로의 29%가 희생된 ‘죽음의 행진’ 뒤에는 조직적 학살이 있었다. 일본군 일부 부대에는 ‘포로를 엄중히 감시하라’는 명령서가 ‘처형하라’고 변조된 채 내려갔다. 죽음의 행진과 학살 행위는 미국에 알려져 공분을 불러일으켰다. 전쟁 후 전범재판에서 당시 일본군 사령관은 유죄를 선고받고 총살됐다. 정작 고의로 명령서를 왜곡한 것으로 알려진 쓰지 마사노부 중좌는 전범으로 기소되지 않았다. 패전 후 미군에 협력한 것으로 알려진 그의 행각은 오늘날까지 의문점으로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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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은 포로뿐 아니라 점령한 필리핀 전체를 망가뜨렸다. 일본 군정은 군표(軍票)를 마구 찍어내 물가가 100배까지 치솟았다. 일본에 필요한 면화를 키운다며 사탕수수 농장을 갈아엎고 민간의 쌀을 군량으로 빼앗았다. 불만을 총칼로 제압하니 거센 저항이 일고 통제는 점점 심해지는 악순환 속에 일본은 필리핀의 민심을 잃었다. 죽음의 행진은 필리핀인들이 일본에 적개심을 품은 첫 단추였다. 사망한 포로 가운데 미군은 2,600여명. 대부분이 필리핀인이었다. 아시아 공영권을 외치면서도 일본은 같은 아시아인들을 멸시하고 더 잔인하게 다뤘다.

바탄 행진 자체에 대해 일본인들의 반론이 적지 않다. 원래 질병에 걸렸던 포로들이 죽었으며 완전무장한 채 같은 거리를 행군했어도 견뎌낸 일본군과 달리 포로들의 정신상태에 문제가 있었다고 발뺌한다. 식량이 떨어지고 병에 걸려서야 항복한 미군의 잘못이라는 주장까지 나온다. 현재의 일본이 과거와 얼마나 다를까. 일본 정부가 ‘죽음의 바탄 행진’에 대해 공식 사과한 게 2009년. 위안부와 강제징용 등의 문제가 불거지던 시기에 느닷없이 죽음의 행군을 끄집어내 사과하며 머리를 조아렸다. 필리핀도 건너뛰고 미국에만.
/권홍우선임기자 hongw@sedaily.com

권홍우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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