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우리나라 주식시장만큼이나 한 치 앞을 내다보기 어려운 상품시장이 있습니다. 바로 국제 유가 시장입니다. 한국시간 기준으로 새벽에 열리는 뉴욕상업거래소(NYMEX)에서 서부텍사스산 원유(WTI) 선물 가격은 ‘널뛰기’가 무엇인지를 제대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작은 소식에도 가격이 크게 출렁이며 급등락을 반복하는 날이 늘고 있죠.
오펙플러스(OPEC+·석유수출국기구인 OPEC과 10개 주요 산유국의 연대체) 긴급 화상 회의가 열린 10일 새벽(한국시간)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이날 회의는 원유 증산(增産) 전쟁의 당사자인 사우디아라비아와 러시아의 감산합의 실행 여부로 전세계 투자자들의 이목을 끌었습니다.
회의에서 OPEC+가 두 달 동안 하루 1,000만 배럴의 원유를 감산하기로 잠정합의했다는 소식이 전해졌지만, WTI 선물가격은 전날보다 9.3%(2.33달러) 폭락한 22.76달러에 거래를 마쳤습니다. 장 초반만 하더라도 산육국들이 대규모 감산에 합의할 것이란 기대감에 국제유가는 장중 10%대까지 치솟았지만 결국 큰 폭의 하락세로 마감했습니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사태로 글로벌 경제활동이 사실상 ‘셧다운’ 되면서 원유 수요가 하루 3,000만 배럴 급감할 것으로 예상되는 상황에서 ‘1,000만 배럴 감산’은 공급과잉 부담을 덜어주기에는 미흡하다고 본 것이죠
하지만 또 모릅니다. 요즘 국제 유가는 ‘럭비공’과 같아서 추가적인 감산 이야기가 나오면 폭등할 가능성이 높습니다. 투자자들이 가장 싫어하는 것이 ‘불확실성’ 인데 말이죠.
그렇다면 왜 산유국들은 감산 합의를 쉽게 하지 못하는 것일까요.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얻으려면 원유시장의 헤게모니를 장악하기 위해 ‘총성 없는 전쟁’을 벌이고 있는 미국, 러시아, 사우디아라비아 등 세 나라의 역학 관계를 이해하는 게 중요합니다.
이들 나라는 글로벌 산유국 ‘톱(Top) 3’ 입니다. 사상 유례없는 저유가 시대가 열린 것도, 최근 국제유가 시장이 혼돈 속에 빠진 것도 모두 이 나라들 때문이죠. 혹자는 현 상황을 이렇게 요약합니다. “러시아는 셰일오일로 산유국 1위에 올라선 미국에 화가 나 있고, 사우디는 감산을 반대하는 러시아에 뿔이 났다. 그리고 미국은 러시아와 치킨게임을 벌이는 사우디를 못 마땅하다”고 말입니다.
좀 더 자세히 살펴볼까요.
먼저 러시아입니다. 러시아는 원유와 가스를 팔아 먹고 사는 나라입니다. ‘중동의 맹주’ 사우디가 OPEC 회원국들을 이끄는 ‘큰 형님’이라면 러시아는 비(非) OPEC 회원국의 대장입니다. 러시아와 사우디가 원유 생산량을 어떻게 유지하느냐에 따라 국제유가는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지요.
두 나라는 2017년부터 국제 유가 하락을 막기 위해 서로 감산 공조체제를 구축해왔습니다. 덕분에 국제 유가는 그동안 배럴당 50~60달러 박스권을 유지할 수 있었죠. 하지만 2월 말부터 러시아의 태도가 바뀌기 시작합니다. 감산 동맹에서 빠지겠다는 겁니다.
이유가 뭘까요. 러시아는 매번 유가 하락을 막기 위해 사우디가 주도하는 감산 결정에 힘을 보태왔습니다. 그런데 감산을 결정할 때마다 미국 셰일오일 업체들이 빈 자리를 메우며 시장 점유율을 끌어올렸습니다. 재주는 자신들이 부리는데 돈은 미국이 쓸어가는 상황을 참다 못해 러시아가 폭발한 겁니다. 겉으론 러시아가 원유 감산 이슈를 놓고 사우디와 힘겨루기를 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러시아의 진짜 타겟은 미국인 셈입니다.
사우디는 그런 러시아가 불만이죠. 지금까지 어렵게 감산을 유지해왔는데 러시아의 이탈은 ‘자기 혼자만 살겠다’는 행동으로 비춰 지는 것이죠. 정권에 따라 부침은 있었지만 미국과 전통적인 동맹 관계인 점도 영향을 미쳤을 겁니다. 사우디라고 미국에 불만이 없진 않았겠죠. 하지만 당장 눈 앞에서 자신들의 이익을 위협하는 러시아가 더 눈에 거슬렸을 겁니다. 사우디가 증산을 시사하며 ‘눈에는 눈, 이에는 이’ 전략을 펴게 된 이유입니다. 사우디는 4월 원유수출 가격도 전월 대비 6달러 내렸죠.
자, 이제 미국입니다. 지난 3년 간 감산 동맹을 유지했던 러시아와 사우디를 치킨게임으로 몰고 간 데는 미국의 책임도 적지 않습니다. 한 때 100달러를 넘어섰던 국제유가가 50~60달러 선으로 내려온 것도, 러시아와 사우디의 기 싸움으로 국제유가가 다시 반 토막 난 것도 모두 미국을 빼놓고 이야기할 수 없죠.
셰일 기업들이 대규모 개발에 나서면서 미국은 2017년 무렵 최대 산유국이자 원유 수출국이 됐습니다. 러시아와 사우디의 아성을 무너뜨린 것이죠. 트럼프는 셰일 혁명과 에너지 독립을 치적으로 자랑해왔습니다. 그런데 과정이 석연치 않습니다. 사우디와 러시아가 지난 3년 간 유가를 떠받치기 위해 열심히 감산을 해오는 동안 미국은 반대로 산유량을 늘려 왔던 것이죠. 물론 국영 석유 기업이 석유를 캐내는 사우디나 러시아와 달리 미국은 민간 셰일 기업들이 석유를 채굴하기 때문에 감산을 하라고 말하기 어렵습니다. 사기업들은 기업마다 재무구조와 원가 구조가 달라서 일률적으로 일정량의 감산을 요구할 수도 없습니다.
하지만 상황이 복잡해지기 시작합니다. 저유가는 에너지 수요가 많은 미국 경제와 소비자에 유리하지만 가격이 너무 떨어지면 오히려 부작용이 큽니다. 셰일오일 혁명으로 최대 산유국이 됐지만 셰일 기업들에겐 생산원가라는 게 있기 마련입니다. 연구기관마다 차이가 있지만 셰일산업의 손익 분기점은 배럴당 30~50달러 정도입니다. 그런데 앞서 이야기했듯이 러시아와 사우디의 증산 전쟁으로 현재 국제 유가는 배럴당 20달러 선까지 내려 앉았습니다. 이 가격 대가 굳어지면 미국 셰일 업계는 연쇄 도산할 수밖에 없습니다. 실제 지난 1일 셰일 업체인 ‘파이팅 페트롤리엄’이 경영 악화로 파산 신청을 했죠. 그렇다고 미국이 선뜻 감산 대열에 나서면 재무 구조가 좋지 않은 셰일 기업들은 시장 점유율 하락으로 어려움을 겪겠죠. 트럼프 대통령이 부랴부랴 무함마드 빈살 만 사우디 왕세자, 푸틴 러시아 대통령과 전화 통화를 하며 유가전쟁 종식을 위해 중재에 나선 이유입니다.
더욱이 올해는 대통령 선거가 있는 해입니다. 셰일 산업은 트럼프의 지지 기반인 텍사스주에 집중돼 있습니다. 셰일 산업이 무너지면, 여기에 막대한 자금을 빌려준 월가도 휘청일 수 있습니다. 이미 코로나19 대응 실패로 위기에 몰린 트럼프 대통령의 재선은 사실상 불가능 해집니다.
그렇다면 과연 앞으로 국제 유가는 어떻게 될까요.
시장 전문가들의 견해는 엇갈리지만 비관론이 우세해 보입니다. 국제 유가가 반등하려면 세 나라가 적당히 양보하면서 차선책을 찾아야 하는데, 쉽지 않아 보입니다. 서로에 대한 불신이 워낙 크기 때문입니다. 이런 상황에선 감산과 관련된 작은 소식 하나에 시장이 크게 출렁일 수 있습니다.럭비공처럼 어디로 튈지 모르는 불확실한 상황이 지속될 수 있다는 것이죠.
더욱이 사우디와 러시아가 OPEC+회의 결과대로 감산에 나선 더라도 또다른 난관을 넘어서야 합니다. 바로 코로나19로 인한 전세계 수요 부진입니다. 지난 1분기 석유 수요는 평소에 비해 하루 평균 1,600만 배럴 줄었습니다. 4월에는 하루 2,000만 배럴의 수요 감소가 예상되고 있습니다.
여기서부터 산수입니다. 이번 OPEC+회의 결과대로 주요 산유국들이 5월부터 하루 1,000만배럴 감산에 나선다고 치면, 최근 줄어드는 수요 대비 절반 정도밖에 공급량을 조절하지 못하는 셈입니다. 지난해 말 기준 러시아와 사우디의 산유랑을 합하면 하루 평균 2,000만 배럴입니다. 미국까지 합하면 3,300만 배럴, 거기에 다른 OPEC 산유국들의 생산량까지 합하면 하루 5,500만 배럴이 공급됩니다.
결국 공급 조절이 쉽지 않은 현 구조 하에선 드라마틱한 수요 회복 없이는 국제 유가 회복도 쉽지 않아 보입니다.
물론 낙관론도 있습니다. 앞서 말씀드린 대로 올해는 미국 대선이 있는 해입니다. 재선을 노리는 트럼프 대통령 입장에서 현 저유가 상태를 그대로 방치하진 않을 것이란 얘깁니다. 유가를 어느정도 회복시켜 셰일오일 업체를 살리는 건 트럼프에게도 유리한 일이죠. 그의 지지층인 셰일 업계(여기엔 막대한 자금을 빌려준 월가 금융회사도 들어가겠죠)를 살리는 ‘구원자’가 될 수 있고, 국민들에겐 ‘콧대’ 높은 OPEC과 러시아를 설득시켜 유가를 지켜낸 ‘영웅’이 될 수 있기 때문이죠. 기름을 팔아 먹고 사는 러시아와 사우디도 현재와 같은 저유가가 오래 지속되길 원치 않을 겁니다.
/서민우기자 ingaghi@lifejump.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