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수, 작사가, 작곡가, 편곡가, 기타리스트, 음악감독, 작가, 그리고 기타 리뷰어까지. 대중음악의 모든 영역을 오가는 박인우씨가 가진 타이틀이다. 음악을 전공하지 않은 그가 대중음악의 최전선에서 활동한다는 것. 만능이라는 표현 말고는 떠오르지 않는다.
중학교 때 선생님이 들려준 로망스의 아름다운 선율이 그를 기타의 세계로 인도했다. 클래식 기타를 통해 연주 기법에 빠져들었고, 고등학교 때 밴드 활동을 하며 일렉 기타에 몰두했다. 취미로만 생각했던 음악은 정치외교학과 졸업 후 그에게 운명같이 직업으로 다가왔다.
10년 간 피나는 노력 끝에 박인우씨는 여러 타이틀을 가진 음악인이 되었다. 그리고 음악의 길로 이끌어준 기타의 리뷰어로서 세상 모든 기타를 소개하는 전도자 역할도 하고 있다. 12년간 5천대가 넘는 기타를 다룬 그의 이야기를 ‘기어타임즈’ 녹화 현장에서 들어보았다.
- 음악을 접한 첫 시작은?
“6살 때 피아노 학원을 다닌 게 시작이었다. 당시 피아노 학원을 다니는 게 유행이어서. 그런데 피아노 치는 게 너무 재미있었다. 하도 열심히 피아노를 치니까 집에서 피아노를 잠가둘 정도였다. 3년 정도 배웠는데 너무 열심히 하다 보니 생각보다 진도가 빨리 나갔다.”
- 기타에 빠진 계기는?
“중학교 2학년 때 기타 특별활동반에 들어갔다. 음악 선생님께서 연주해 주신 로망스 멜로디에 나도 모르게 빠져버렸다. 클래식 기타 부에서 실력 좋은 친구에게 기타를 주겠다는 공약에 열심히 연습해 그 기타를 얻었다. 동아리에서 가장 실력이 좋아 독주를 맡기도 했다.”
- 음악에 재능이 있다고 생각했나?
“악기 마다 또래 집단에서 가장 빠르게 배우고 잘 한다는 걸 알게 되었다. 다른 친구들이 어려워하는 것들이 나에게는 쉬운 편이었다.”
- 리코더 전국 대회 우승도 했다고?
“리코더가 오케스트라의 원형이 되는 악기라는 음악 선생님의 철학과 추천으로 리코더를 배웠다. 당시 원주 시립 리코더 합주단에서는 베이스 리코더 주자로 활동했고, 강원대학교 리코더과 교수님께 사사하기도 했다. 중학교 때는 도 대회에서 수상했고, 고등학교 1학년 때 알토 리코더 중주 부분 전국 대회에서 우승을 했다.”
- 밴드부 활동은 어땠나?
“고등학교 때 밴드부 활동을 했다. ‘불휘’라는 이름이었는데 강릉에서 꽤 유명했다. 밴드를 하며 일렉 기타부터 다양한 음악 장르를 접할 수 있었다. 당시 일렉 기타를 학원에서 배웠는데 가르쳐줬던 선생님이 ‘드림시어터’ 매니아였다. 덕분에 테크니컬한 부분이 꽤나 향상됐다.”
- 전공으로 할 생각은 없었는지?
“전혀 없었다. 당시 희망했던 직업이 언론인이나 외교관이기도 했고. 음악은 내가 좋아하고 즐겨하는 취미 정도라 생각했다. 고3 때 잠시 고민한 적도 있었지만 일단 진학부터 하기로 했다.”
- ‘슈퍼주니어’ 희철씨와 절친이었다고?
“희철이가 중학교 1학년 때 전학을 왔다. 첫인상은 꼭 시골 아이가 처음 서울 사람을 본 것 마냥 무척 세련되고 고운 이미지였다. 금방 친해져서 희철이 집에도 자주 놀러갔고. 무엇보다 절친 오락실 메이트였다. 신나게 오락실 다니며 ‘킹 오브 파이터즈’와 ‘철권’을 미친 듯이 했다.”
- ‘악동클럽’ 멤버가 될 뻔한 사연은?
“될 뻔도 아니었다. 학교에 오디션이 왔었고 참여한 정도. 예선에서 ‘몰래한 사랑’이라는 트로트를 불렀는데 바로 광탈했다. 결국 동기 중 정이든이라는 친구가 멤버로 나왔다.”
- 정치외교학과를 전공했다.
“원래 신문방송학과를 생각했다. 언론 쪽 취직을 희망하기도 했고. 계열로 입학해 다양한 기초 과목을 들었는데 ‘정치학입문’ 수업이 너무 좋아 자연스레 전공으로 선택했다.”
- 대학 때는 밴드 활동을 안했나?
“사실 ‘아카라카’ 응원단이나 유명한 ‘소나기’ 밴드를 해볼까도 싶었다. 그런데 알아보니 굉장히 빡센 동아리 문화가 있더라. 저학년 때는 궂은 일도 많이 해야 하고. 그래서 단과대 밴드를 알아봤는데 실력차이가 너무 컸다. 이제 갓 기타를 배우기 시작한 친구들이 대부분이었고.”
- 그래서 풍물패를 시작 한건가?
“아예 모르는 악기를 배우자 싶었다. 우리나라 악기를 알고 싶기도 했고. ‘터얼’이라는 단과대 동아리에 들어갔는데 사실 풍물패에서 나는 조금 모난 사람이었다. 한국 음악은 기술보다는 여백의 미나 정서 등을 중요하게 생각하는데 나는 자꾸 분석을 해댔다. 그래서 선배와 사부들이 언짢아 하셨고. 그래도 덕분에 보다 다양한 음악 장르를 경험할 수 있었다.”
- ‘국악 연구회’까지 들어갔다고?
“제대 후, 중앙동아리 ‘국악 연구회’에 들어가서 가야금을 배웠다. 당시 황병기 선생님 수업이 있어 신청했는데 음악에 대한 관심을 보시더니 ‘한국가요제’에 나가보라는 제안을 하셨다.”
- ‘한국가요제’ 동상, 최초의 수상이었나?
“그렇다. 사실 대학교 들어가자마자 이론 및 작곡 공부를 시작했고, 군대에서 20곡정도 자작곡을 해뒀다. 제대 시점에서는 작곡을 꽤나 마스터했고. 여기에 동서양 악기들까지 배우니 음악 스펙트럼이 넓어졌다. 국악을 접목한 ‘신새벽’이라는 곡으로 동상을 받았다.”
- 음악으로서의 직업인, 결심의 시작이다.
“음악을 직업으로 안하면 평생 후회할 것 같았다. 2008년 첫 싱글 앨범을 발표했는데 이쯤 되니 작사, 작편곡, 노래, 연주, 믹스, 마스터까지 부족하지만 어떻게든 전부 가능한 상태가 됐다.”
- 싱어송라이터를 선택한 이유는?
“‘이적’ 같은 싱어송라이터를 지향했다. 그런 아티스트를 하고 싶었고. 물론 쉽지 않다는 걸 곧 깨닫게 되었지만. 사실 종종 디씨 기타 갤러리를 방문하는데 거기서 누가 나를 이렇게 표현 하더라. ‘언럭키 이적’이라며. 웃기면서도 한편 가슴을 후벼 팠다.”
- 대중음악으로 넘어간 계기는?
“2011년까지 싱어송라이터로 활동 하다 고민이 많아졌다. 당시 29살이었는데 음악으로 먹고 살기가 참 쉽지 않다는 걸 깨달았다. 그러다 ‘유재하 가요제’에 함께 참가했던 박수석 작곡가가 같이 일해보자는 제안을 해왔다. 당시 그는 시크릿, B.A.P가 있던 TS의 전속 작곡가였다.”
- 아이돌 작곡가 커리어로의 첫 작품은?
“어느 날 TS 작업실에 놀러갔는데 그 때부터 자연스레 눌러앉게 되었다. 2011년 10월 시크릿 정규 1집 ‘네버랜드’라는 곡에 작사가로 참여한 게 시작이었다. 2012년 B.A.P 앨범에는 작곡가로 참여하기 시작했고.”
- 가장 기억에 남는 순간이 있다면?
“첫 저작권료가 작사 한 곡 만으로 80만원이 들어왔다. 그 간 내 수 많은 곡들이 합해봐야 한 달에 3~4만원 정도였는데. 벌이가 되니 더 열심히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더라. 그런데 정말 대중음악이라는 건 쉽지 않았다. 트렌디한, 상업적인 사운드는 전혀 다른 차원의 것이었다.”
- 전혀 다른 시장이라 적응이 힘들었겠다.
“초반 1~2년이 가장 힘들었다. 단순히 연주가 아닌, 사운드 메이킹을 어떻게 하면 세련되게 할지가 대중음악에 필요한 덕목이었다. 덕분에 내가 할 수 없던 영역의 것들을 배우기 시작했고. 정말 노이로제가 걸릴 정도로 미친 듯 공부하며 달렸다. 그렇게 5년을 버텼다.”
- 첫 타이틀이 시크릿 송지은의 ‘희망고문’ 이었다고?
“첫 타이틀이라 기억이 남기도 하고, 타이틀이라 많은 수익을 얻기도 했다. 한 곡 누적 수입으로 3~4천만원 정도 벌었으니까. 대중음악은 타이틀이 아니라면 아무리 아이돌이라도 곡 당 천만원 벌이를 넘기기 힘든 게 현실이다.”
- 소속 작곡가가 되고 싶진 않았나?
“TS에서도 제안이 왔고 타사에서도 왔었다. 그런데 사실 회사와의 계약은 스스로 반대였다. 언젠가는 내 음악을 할 생각이 있었으니까. 치열한 아이돌 작곡 시장에서 소속이 된다는 건 분명 메리트가 있겠지만. 아무튼 TS 일을 안 하고 부터 아이돌 작곡 일도 많이 줄었다.”
- 아이돌과의 작업은 어떤가?
“아이돌은 시스템으로 돌아간다. 발매 시기부터 홍보까지 디테일한 전략이 필요한 사업이다. 그래서 담당 작곡가들도 그 루틴에 동참해야 하고. 아무래도 텐션이 높을 수밖에 없다.”
- 흐름이 빨리 바뀌는 판, 적응하기 힘들지 않았나?
“어느 정도 실력이 생겼다고 생각하는 순간 더 잘하는 후배들이 치고 올라온다. 그리고 트렌드도 너무 빨리 바뀌고. 이제 작곡가들도 트렌드 분석 자체를 포기할 정도다. 이렇게 트로트가 다시 뜰 거라고 누가 예상했겠나.”
- 순위에 대한 스트레스도 많이 받았겠다.
“예전만 해도 중견급 아이돌 앨범이 나오면 탑 100에는 오를 수 있었다. 그런데 이제는 그 자체가 쉽지 않다. ‘희망고문’이 11위까지 올라간 것도 지금 생각해보면 참 감사한 일이다.”
- 요즘 아이돌 곡의 트렌드는?
“나도 모르겠다. 예측도 불가하고. 팀의 정체성 자체가 트렌드를 만드는 것 같다. 뭘 가지고 나와도 상관없는 시대라는 생각도 들고. 팀의 코어를 중심으로 그들만의 새로움 한 스푼이 잘 더해지는 것 같다.”
- 또 장르가 바뀌었다.
“이필호 음악감독과의 인연이 시작이었다. TS 타 작곡가의 소개로 작업을 하게 되었고, 사석에서 친분이 생겼다. 그 당시 감독님이 연주곡을 만들어보라는 제안을 주시며 그 쪽 작업을 맡았다. 2015년 초였고, ‘블러드’, ‘왕꽃선녀님’에 연주곡들이 들어갔다.”
- 이후 본격 드라마 작품에 집중하게 되었다.
“2015년 초 TS 일을 그만두자마자 때마침 ‘프로듀사’ 해외판 곡 작업 의뢰가 들어왔다. 그렇게 제대로 한편의 드라마 작업을 처음으로 해봤다. 이후 이필호 감독에게 이쪽 일을 본격적으로 해보고 싶다는 말씀을 드렸다.”
- 이필호 감독님과의 작업은?
“단막극이 시작이었다. 이후 본격적으로 ‘동네변호사 조들호’에 참여했고. 드라마 작업이라는 게 호흡도 길 뿐만 아니라 작품이 방영되는 내내 매일같이 철야 작업을 해야 했다.”
- 쇼미더머니’의 우승곡도 만들었다고?
“TS 일을 그만뒀다는 게 업계에 소문이 났다. 사실 소속 직원도 아니었는데 모두가 그렇게 알고 있었다. 그 때 작곡가 지인의 부탁으로 베이식의 ‘좋은날’ 작곡에 참여했는데 결국 그 곡으로 ‘쇼미더머니 시즌4’ 우승을 했다. 덕분에 이 치열한 대중음악 일도 틈틈이 할 수 있었다. 소녀시대, f(x), 다비치, 시스타, 카라, 마마무, 포미닛, 헬로비너스, 에이핑크, 비스트, 언터쳐블, 케이윌, 초신성, 마마무, 허각 등 다양한 아티스트와 함께 했다. 최근 우주소녀와도 작업을 했고.”
- 다큐나 드라마 쪽 수입은 어떤가?
“대중음악 작업은 곡비와 인세를 모두 기대할 수 있는데 이쪽은 조금 다른 영역이더라. 박리다매가 기본이라 작품이 쌓이기 전에는 수익은 적고 업무 강도는 굉장히 높다. 작품 수가 늘어나고 수출을 통해 해외저작권이 쌓이면 큰 수익으로 연결되는 경우도 있지만, 결국 고수익을 지속적으로 올리기 위해서는 메인 음악 감독이 되는 것이 가장 좋은 방법이다.”
- 다방면으로 일을 해야겠다.
“그동안 써놓은 대중음악 곡들의 저작권료, 기타 연주자로의 참여, 그 외 여러 활동들로 부수입을 운용해야 한다. 다양한 프로필 없이 한 장르만 하다보면 현타가 올 수 밖에 없다.”
- 음악감독으로의 첫 입봉작은?
“이호경 피디와 함께했던 KBS 스페셜 ‘앎’. 작품도 잘됐고 상도 많이 받았다. 나중에 영화화도 됐고. 이후 이호경 피디의 작품에 음악 감독으로 계속 참여하고 있다. 드라마 중에서는 ‘김과장’이 가장 기억에 남는다. 드라마가 잘 되기도 했고, 작업 퀄리티 자체도 좋았다.”
- 쉽지 않은 지점도 있겠다.
“자금 운용과 수입 예측이 아무래도 쉽지 않다. 작업비가 작품 마치고 3~4달 후 지급되는 경우도 많고, 해외의 경우 1~2년 뒤에 들어오기도 한다. 그래서 지금 일이 없으면 1년 후가 오히려 걱정이 된다.”
- 작품의 음악감독을 하며 좋은 점은?
“기본적으로 작업 과정이 즐겁다. 그리고 작곡가 세계가 도제식 문화가 있어 빡센 편인데 내가 이런 문화를 싫어한다. 그런데 이필호 감독 역시 이런 시스템을 지양하는 분이어서 좋다.”
- 다큐와 드라마 음악감독, 어떤 차이가 있는가?
“다큐는 좀 더 담백하게 작업하는 경우가 많고, 드라마는 편곡에 재료가 많이 들어가는 편이다. 그런데 요즘에는 장르가 넘나드는 추세라 연출의 성향 따라 가는 것 같다.”
- 음악감독으로서 해보고 싶은 작품이 있다면?
“올해 안으로 드라마 감독 단독 입봉이 목표인데 로맨틱 코미디 장르를 해보고 싶다. 아무래도 드라마 장르가 예산이 크다보니 할 수 있는 게 다양하다.”
- ‘기어타임즈’ 리뷰어로도 활동 중이다. 몇 년이나 했나?
“총 12년을 했고(초창기 투데이스 기어 시절 포함), 6천개 정도의 리뷰 영상에 참여했다. 1년에 올라가는 영상이 700개 정도다. 담당 피디만 4명, 전체 팀원도 열 명 가까이 된다.”
- 소개하는 악기를 정하는 기준은 무엇인가?
“선정이랄 게 딱히 없는 게 취급하는 모든 브랜드의 악기를 전부 리뷰한다. 단 버즈비라는 판매처에서 취급하는 브랜드가 기준이고. 가끔 외부 요청으로 특집 방송 할 때도 있다.”
- 프로그램만의 방식이 있다면?
“사실 악기 리뷰의 방식은 거의 정해져있다. 가끔 이벤트를 진행하는 등 디테일이 조금씩 달라지는 정도. 테크니컬 스펙 소개, 시연, 평가, 합주라는 큰 틀에서 벗어나진 않는다.”
- 기타에 대한 스펙을 원래 잘 알았나?
“잘 몰랐다. 기타 목재가 그렇게 많은 줄 누가 알았겠나. 기타는 소리만 좋으면 되는 거라 생각했다. 초창기에는 욕도 많이 먹었다. 그래서 바로 공부 모드에 돌입했고. 그런데 신제품은 계속 쏟아지고 스펙들은 매일같이 바뀐다. 아무리 체크해도 가끔 오류가 난다.”
- 별도 자문이 있는지?
“결국 내가 최종 검수자가 된다. 12년 정도 했으니 나보다 잘 아는 사람도 별로 없고. 이제는 자신이 없으면 솔직하게 말씀 드리거나 전문가를 소환한다. 그러면 알아서 댓글을 달아주신다. 너무 깊게 들어가면 나도 잘 모른다 하고. 6년차 즈음부터 좀 편해졌던 거 같다.”
- 백과사전 첨삭도 한다고?
“첨삭은 아니고, 예전에 ‘두산백과사전’에서 기타 파트 집필 제안이 왔다. 글자 하나 하나의 무게감이 너무 크게 다가왔다. 내 성격상 팩트에 집착하다 지치겠다 싶었고. 3장을 써본 후 정중히 거절하기로 했다. 나중에 낸 ‘기타 100’이라는 책이 네이버 지식백과에 등재됐다.”
- ‘기타 100’은 무엇인가?
“100개의 기타를 소개하는 책이다. 음악출판업계에서 일하는 작가이자 편집자인 지인과 공저로 쓰게 됐다. 사전식 집필이라 세부적인 사실 확인의 업무량이 엄청났고, 저작권의 해결을 위해 각 브랜드에 직접 연락을 취해 사용 가능한 사진을 제공받는 과정도 만만찮았다. 책 낼 때 즈음 그 새 스펙이 바뀌어 수정도 반복해야 했다. 기타 길이와 무게 체크도 힘든 과정이었다.”
- 길이와 무게까지 알려줘야 하나?
“악기는 보는 것과 실연의 차이가 꽤나 다르다. 보기엔 예쁜데 생각보다 크거나 작을 수도 있고. 체형별 스탠다드가 필요하다 생각했다. 사실 이는 악기사들도 그간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던 지점이었다. 내가 나서서 5년째 하다 보니 어느 정도 그 공식을 전할 수 있게 되었다.”
- 100개의 기타를 선정한 기준은?
“대중성이 기준이었다. 리뷰를 하며 세상 거의 모든 악기를 다루다보니 대중성을 어느 정도 판단할 수 있었고. 그렇게 200개를 정한 후 소거법으로 줄이고 줄여 100개를 남겼다. 나름 이 과정이 꽤나 재미있더라. 마치 이상형 월드컵을 하듯 줄여갔다.”
- 기타 교본 책도 챘다고?
“기타 입문 서적을 예전에 한 권 냈었다. 나중에 ‘야마하’와 계약해 수업 자료로 내기도 했고. 사실 한권 더 준비 중인데 언제 나올지는 모르겠다. 일단 사전식 글쓰기는 당분간 쉬고 싶은데, 에세이는 한 권 써보고 싶다. ‘기타로 먹고 살기.’ 같은.”
- ‘기타로 먹고 살기’, 가능한가?
“당연히 기타로‘만’ 먹고 살기는 힘들다. 극소수의 일류 연주자들을 제외하면 기타리스트‘만’으로는 먹고 살기 힘들다는 이야기를 해주고 싶은 거다. 현실적인 이야기를 들려주면 직업으로 결정하는데 도움이 되지 않을까.”
- 기타 리뷰를 하며 좋은 점은?
“악기 욕심이 많이 없어졌다. 돈을 내고서도 하고 싶은 일을 오히려 돈을 받고 할 수 있다는 게 복이라 생각하고. 마지막으로 12년간 5천대 넘는 기타를 쳐봤다는 건 정말 경이로운 경험이라고 생각한다.”
- 특히 기타를 애정 하는 이유는?
“영원한 나의 원픽과도 같은 존재다. 기타리스트로서의 정체성도 있고. ‘내 악기다.’라고 생각하는 부분이 가장 큰 것 같다.”
- 소개했던 기타 중 가장 기억에 남는 제품은?
“이건 노코멘트 하는 게 좋을 것 같다. 예전에 비해 기타에 대한 이야기하는 게 조심스러워졌다. 개인적으로는 연주하기 편한 가성비 좋은 기타를 선호한다.”
- 앞으로 기타 리뷰어로서 하고 싶은 역할이 있다면?
“지금의 상태에서 더 디테일하게 다져가는 역할을 하고 싶다. 리뷰라는 것 자체가 주관의 객관화 과정이라고 생각한다. 이미 객관화 자체가 쉽지는 않지만, 반복적인 루틴과 경험을 기반으로 믿고 볼 수 있는 콘텐츠를 계속 만들어 가고 싶다.”
- 궁극적인 꿈은 무엇인가?
“음악 잘하는 음악인으로 기억되고 싶다. 음악인들 사이에서 인정받는 사람이면 더욱 좋겠고. 지금의 수많은 직업들 중에서 이제는 좀 더 집중해야 할 시기인 것 같기도 하다.”
- 최근 ‘슈퍼주니어’ 희철씨와도 작업했다 들었다.
“예전에 발매했던 ‘토끼와 거북이’라는 곡을 리마스터링 했다. 10분짜리 뮤지컬 형식의 곡이다. 거기서 주인공인 거북이 역을 희철이 맡았다. 슬리피 등 지인들이 참여해 의미 있는 작업이기도 했고. 어렸을 때의 절친과 음악적으로 함께 작업한다는 게 감회가 참 새로웠다.”
- 올해의 계획은?
“개인 작업 계획은 없다. 드라마 메인 음악 감독 입봉이 유일한 목표다. 개인 유튜브 채널 활성화에도 힘을 좀 쏟고 싶고.”
- 제작사 등 사업화할 생각은 없는지?
“전혀 없다. 그럴 여력도 없고. 확장을 생각한다면 당장에 일을 못할 것 같다. 누가 우리 팀을 인수해준다면 기꺼이 응할 생각은 있다. (웃음)”
- 정치하고 싶은 마음도 있나?
“정치외교학과를 전공했다는 것 자체가 정치에도 관심이 있다는 거다. 나중에 뭐든 문화와 관련된 일이라면 해보고 싶다.”
- 비전공자로서 음악을 꿈꾸는 모든 사람들에게 한마디.
“예술이 전공을 해야지만 할 수 있는 분야는 아니다. 다만 전공을 안 한 사람이라면 전공자 이상의 텐션으로 살아야 한다. 그만큼의 공부와 노력이 필요하며 이 과정 없이 비전공자 콤플렉스를 극복할 수 없다. 단 이를 넘어서는 순간 본인에게 가장 자랑스러운 커리어가 될 것이다.”
원부연. 서울경제신문 라이프점프 객원기자. 전 광고 기획자에서 음주문화공간 기획자로 창직 후 술집, 극장, 살롱 등 서로 다른 9개의 공간을 런칭했다. <합니다, 독립술집>, <회사 다닐 때보다 괜찮습니다.>, <퇴사 말고, 사이드잡> 세 권의 책을 쓴 작가로도 활동 중이다.
/원부연 객원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