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 ‘잠정 타결’돼 ‘이르면 이달 1일 발표될 것이라던 ‘한미 방위비분담금특별협정(SMA)’ 협상이 사실상 장기화의 길로 접어들었다. 주한미군 한국 근로자들 수천 명이 볼모로 잡혀 무급휴직을 당한 상태에서 일각에서는 올해 안에도 타결이 어려울 것이라는 관측까지 나온다. 자신의 재선을 의식한 트럼프 대통령의 돌발적이고 강경한 노선에 한국의 협상 전략에도 비상이 걸리게 됐다. 국회의원 선거를 앞두고 타결 가능성에 자신감을 보였던 청와대와 정부 역시 상당히 곤혹스러워 하는 분위기다. 청와대 발 ‘잠정 타결’ 설은 ‘막판 진통’ 설로 번졌다가 ‘김칫국’ 논란이 되더니 이제는 대표적 ‘착각 외교’ 사례로 남게 됐다.
트럼프, 한국의 방위비 13% 인상안 거부
10일(현지시간) 로이터통신에 따르면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SMA과 관련해 한국 측이 전년 대비 최소 13%를 인상하겠다며 내놓은 ‘최고 제시액’을 최종 거부했다. 미국 당국자의 말을 인용한 보도가 사실이라면 결국 예상대로 트럼프 대통령이 직접 판을 뒤집은 셈이다.
로이터통신은 트럼프 대통령의 한국 측 제안 거부 결정은 지난주 마크 에스퍼 국방장관, 마이크 폼페이오 국무장관과의 협의를 거쳐 이뤄진 것이라고 전했다. 지난 6일 이뤄진 한미 국방장관간 전화통화에서도 에스퍼 장관이 정경두 국방부 장관에게 ‘트럼프 대통령이 훨씬 더 큰 한국의 분담을 기대하고 있는 방위비 협상에 대해 신속한 타결을 압박했다’고 보도했다
로이터통신은 또 지난달 17∼19일 미국 로스앤젤레스에서 열린 제11차 SMA 7차 회의를 언급하며 “한국이 제안을 내놓았을 때 그것은 전혀 감동스럽지 않았지만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대응에 주력하던 점에 비춰 그러한 합의가 충분히 좋을 수 있다는 일정한 희망이 있었다”고 전했다. 통신은 아울러 전·현직 당국자들이 사석에서 한국 총선 전 등 며칠 내에 새로운 합의가 이뤄질 희망이 별로 없다고 말하고 있다는 내용도 밝혔다. 일부는 수주, 수개월 내 타결 가능성에 대해서도 의문을 제기하고 있고 11월 미국 대선까지 교착 상태가 이어질 것이라는 우려가 있다는 내용도 있었다. 한미 동맹 타격 우려에 대한 전문가들의 지적도 포함됐다. 로이터통신은 미국 측이 80분 만에 협상장을 박차고 나왔던 지난해 11월19일 협상 당시 한국 측이 실제 분담액을 삭감하는 제안을 했던 것으로 나타났으며 이러한 제안이 미국 측을 불쾌하게 만들었다고 보도하기도 했다.
‘잠정타결’→‘막판 진통’→‘김칫국’→‘장기화’
사업가 기질과 변덕을 감안해 트럼프 대통령이 SMA 협상을 원점으로 돌렸다는 분석은 이미 일찌감치 나왔었다. 미국 최고 지도자의 결정이 아니고서는 청와대와 한국 정부가 총선을 앞두고 그토록 기대했던 결과가 이렇게 한 순간에 물거품으로 만들 다른 어떤 변수도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크리스토퍼 힐 전 대사는 지난 8일 미국의 목소리(VOA) 방송에 출연해 “방위비 분담금 문제와 관련한 미국과 한국의 간극이 여전히 큰 것으로 안다”며 우려를 나타낸 바 있다.
트럼프 대통령이 완고한 입장을 내비친 것으로 알려지면서 ‘잠정 타결’이라는 소식을 섣불리 알린 청와대와 한국 정부는 국내외적으로 더욱 난처한 상황에 빠졌다. 이제는 외교가 안팎에서 “협상이 진척 중”이라는 언급을 하는 사람이 아무도 없게 됐다. 한 외교부 고위관계자는 “한미 방위비 협상은 어찌 진행되고 있느냐”는 질문에 말 없이 고개만 절레절레 흔들기도 했다.
당초 한미 방위비 협상 타결 기대감은 지난달 31일 정은보 한미방위비분담협상대사의 영상 브리핑에서 시작됐다. 그는 이달 1일 부로 주한미군 내 한국 근로자 4,000여 명이 사상 초유의 무급휴직 사태를 맞게 되자 “상당한 의견 접근이 이뤄지고 있다는 점에서 조만간 최종 타결될 것으로 기대한다”고 말했다. 이후 청와대와 정부 고위관계자들이 31일과 1일 청와대와 정부 내부에서 일부 언론에 ‘잠정 타결’ ‘이르면 1일 발표’ 등의 정보를 흘리면서 기대감은 정점에 달했다. ‘유효기간 5년으로 연장’, ‘총액 1조원 ‘+α’’ 등과 같은 세부정보까지 정부 내부에 유통됐다. ‘지난달 24일 문재인 대통령과 트럼프 대통령 간 통화 이후 협상이 급물살을 탔다’ ‘미국에 코로나19 상황이 급박해지면서 진단 키트를 원조해주는 조건이 통했다’ 등의 분석이 나오는 와중에 청와대는 ‘그런 보도도 있더라’며 공식적으로 부정하는 자세도 취하지 않았다. SMA 성과가 클 경우 관례를 깨고 외교부가 아닌 청와대가 사상 처음 직접 결과를 발표할 것이라는 얘기도 나왔다. 그러다 이달 2일 강경화 외교부 장관까지 투입하고도 협상이 결렬됐다는 소식이 전해지면서 분위기는 급랭됐다. 같은 날 로버트 에이브럼스 주한미군 사령관은 자신의 트위터에 ‘김칫국 마시다’라는 문구를 리트윗해 논란을 더 키우기도 했다.
“11월 美대선 전까지도 힘들 것”... 해리스 대사는 ‘사임설’
일각에서는 트럼프 대통령의 성향 상 SMA 협상이 11월 미국 대선 전까지 이어질 수 있다는 전망이 나온다. 그가 자신의 선거에서 한미 방위비 협상 결과를 일종의 성과로 과시하려 할 것이라는 관측 때문이다.
이런 가운데 해리 해리스 주한 미국대사까지 올 11월 사임할 것이라는 설이 제기돼 외교가를 달구고 있다. 지난 9일 로이터통신은 복수의 소식통을 인용해 “해리스 대사가 개인적으로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의 재선 여부와 관계 없이 11월 미국 대통령 선거 이후로는 한국에 체류할 계획이 없다고 말했다”고 보도했다. 해리스 대사는 지난 2018년 7월 주한 미국대사로 부임했다.
해리스 대사의 사임 계획의 이유는 구체적으로 알려지지 않았다. 다만 로이터 통신은 한미 방위비분담금 협상과 한일 군사정보보호협정(지소미아) 등 정치 현안을 놓고 한국과 미국이 잇따라 충돌한 데 따른 긴장감이 그에게 부담으로 작용했을 것으로 추측했다. 로이터통신은 또 지난해 10월 한국 학생들이 주한 미국대사관에 기습 진입해 방위비 인상 반발 시위를 벌인 데 대해 미 국무부가 불만을 표한 점, 해리스 대사가 일본계 혈통이라는 이유로 한국인에게 반감을 산 점 등도 그가 사임을 원하는 근거로 들었다.
실제 해리스 대사는 북미 비핵화 협상과 지소미아 문제 등 한미 간의 주요정치 이슈가 불거질 때마다 주재국 대사로서는 이례적으로 정치적 발언을 계속해 논란의 중심에 선 바 있다. 일각에서는 해리스 대사의 콧수염이 일제강점기 일본인 총독과 비슷하다는 조롱까지 나오기도 했다. 이는 한국인들에게 친근함을 줬던 전임 마크 리퍼트 전 대사와는 대비되는 이미지였다.
주한 미국대사관은 이에 대해 한미동맹 강화에 일조하겠다는 해리스 대사의 의지에는 변함이 없다고 밝혔다. 미 대사관 대변인은 “해리스 대사는 대통령의 뜻에 따라 직무를 수행하고 있으며 미국을 위해 지속적으로 적극 봉사하고자 한다”며 “한국은 미국 대사로서 최고의 근무지이자 미국에게는 최고의 동반자이며 동맹이다”라고 강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