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서울시장선거를 코앞에 둔 2014년 3월. 박원순 서울시장과 시장 도전에 나선 정몽준 새누리당 의원이 용산 개발 문제로 장외 설전을 벌였다. 정 의원이 1년 전 좌초한 용산국제업무지구 개발의 재추진을 공약한 데 대해 박 시장은 “그게 가능하겠느냐”며 싸늘한 시선을 보냈다. 박 시장은 “딱 보면 아는 거 아닌가. (가능했더라면 ) 벌써 내가 했을 것”이라고 일축했다.
# 지방선거 한 달 뒤인 2018년 7월. 3선에 성공한 박원순 서울시장이 싱가포르 방문 중 느닷없이 ‘용산 통째 개발론’을 꺼냈다. 박 시장은 “서울역~용산역 구간을 지하화해 컨벤션시설과 쇼핑센터로 통째로 개발하겠다”고 밝혔다. 후폭풍은 컸다. 집값 급등세에 기름을 끼얹은 격이었다. 박 시장은 결국 “집값이 안정될 때까지 용산 개발 마스터플랜 실행을 유보하겠다”고 한발 물러섰다.
현직 서울시장과 시장 도전에 나서는 정치인은 용산(龍山)을 탐낸다. 멀리는 오세훈 전 서울시장부터 정몽준 전 의원, 지금의 박 시장까지. 대권 잠룡으로 인식되는 서울시장으로서는 용산 개발은 참을 수 없는 유혹이다. 지세가 용을 닮아 붙여진 용산의 지명부터 매력적이다. 광화문과 강남을 연결하는 길목이고 한강을 접한 천혜의 입지적 여건 때문만도 아니다. 임오군란 때 청나라 군대가, 러일전쟁 때 일본군이, 한국전쟁 후 미군이 주둔한 역사성은 용산 개발의 상징성을 키운다.
잠잠하던 용산 개발론이 돌연 총선 정치판에 소환됐다. 이번에는 ‘2030세대용’ 주택 개발이다. 더불어민주당은 총선 공약을 통해 전국에 행복주택과 신혼희망타운 10만가구를 짓겠다고 밝혔다. 민주당은 특히 수요가 몰리는 서울에서 용산 코레일 부지와 국공유지를 활용해 1만가구를 공급하겠다고 했다. 이 공약은 정부의 주거복지 로드맵의 재탕 수준에 불과하지만 서울 후보지로 코레일 부지를 콕 집었다는 것은 주목할 만하다. 용산 미래도시계획의 핵심인 이 부지의 활용방안에 청년·신혼주택을 짓겠다는 구상이 공식화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코레일의 철도차량 기지였던 용산 부지는 한강로3가 일원 36만여㎡(약 11만평·철도 제외)로 축구장 50여개만 한 크기의 나대지다. 2007년 부채 감축이 시급한 이철 당시 코레일 사장과 치적을 남기고 싶은 오세훈 시장이 손을 잡았다. 한국판 ‘롯폰기힐스’ 구상인 용산국제업무지구 개발이다. 개발사업자는 총 사업비 31조원 규모로 단군 이래 최대 개발사업의 닻을 올렸으나 글로벌 금융위기로 휘청대더니 결국 첫 삽도 뜨지 못한 채 2013년 좌초했다.
여당의 코레일 부지 차출론은 13년째 시간이 멈춰 있는 이곳의 개발지도를 미궁에 빠뜨렸다. 이 땅은 세계적인 국제업무지구를 조성하려는 서울시, 부채 감축이 시급한 코레일, 집값을 안정시켜야 하는 국토교통부, 개발에 기대를 걸어온 지역 주민 등의 이해관계가 복잡하게 얽혀 있는 ‘동상이몽’의 현장이다. 그래서 공약대로 순탄하게 진행될지는 미지수라는 평가가 많다. 선심성 ‘공약(空約)’ 또는 ‘희망고문’이라는 비판도 나온다.
땅 주인인 코레일은 난감하다는 반응 일색이다. 이 부지는 참여정부 시절에 마련한 코레일 부채 감축 계획의 핵심 자산이다. 코레일의 부채는 자그마치 15조원. 빚더미에 가위눌린 코레일로서는 매각 또는 개발로 한몫 챙겨야 숨을 돌릴 수 있지만 대량의 부지를 징발당한다면 재무구조 개선 계획에 차질이 예상된다. 서울시는 말을 아끼고 있다. 서울시의 한 관계자는 “아직 민주당은 물론 국토부와도 아무런 협의가 없었다”며 “주거시설이 일부 들어가기는 하겠지만 코레일 입장도 있는 것 아니냐”며 신중한 반응을 보였다. 하지만 용산에 깃발을 꽂은 여당의 선제공격에 한방 맞았다는 기류도 감지된다. 그도 그럴 것이 용산 개발은 여권의 잠룡인 박 시장의 대권 발판용 ‘빅카드’로 꼽히기 때문이다.
관건은 얼마나 많은 땅이 차출되느냐다. 민주당은 추후 협의할 과제라고 설명하면서도 구체적인 계획을 밝히지 않고 있다. 부지를 통째로 활용해도 지을 수 있는 주택은 대략 7,000여가구 (건폐율 50%, 용적률 300% 기준). 서울 1만가구 목표를 다 채우기도 벅차다. 서울은 심각한 택지구득난에 처해 있다. 정부와 서울시는 청년·신혼주택 후보지를 찾다 못해 다세대·다가구주택 매입은 물론 빈집 리모델링까지 동원하는 실정이다. 정부는 올 2월 영등포와 남태령 군 시설까지 싹싹 긁어모아 2,000가구분을 어렵게 확보한 적이 있다. 1만가구 목표치를 채우려면 코레일 부지의 상당 부분을 의존해야 한다는 의미다.
개발 가성비도 문제다. 미래의 입주자로서는 ‘로또 대박’이겠지만 토지 효율성 측면에서도 낙제점이다. 코레일은 2007년 이 땅을 8조원(3.3㎡당 7,000만원)에 매각했다. 현재 가치로 따지면 최소 10조원에 이른다는 게 부동산 전문가의 진단이다. 용산국제업무지구에서 분리된 서부이촌동 재개발 지역의 땅값은 3.3㎡당 1억원을 호가한다. 이에 대해 김철흥 민주당 국토교통위원회 수석전문위원은 “비싼 땅이라는 것은 알지만 기득권 세대만 살아야 하느냐”며 “젊은 미래세대가 더불어 공존하는 주거공간이 필요하다”고 설명했다. 그래도 비싼 땅을 싸게 이용하는 게 바람직한 것인지에 대한 의문은 남는다.
서울 한복판에 10만평이 넘는 나대지, 그것도 주인이 하나인 땅은 눈을 씻고 찾아도 없다. 용산의 한 공인중개사는 “금싸라기 땅에 임대주택을 짓겠다는 게 말이 되느냐”며 “오랫동안 개발에서 소외된 서부이촌동 주민의 반발이 극심할 것”이라고 말했다. 도시계획 전문가인 이현석 건국대 부동산학과 교수는 “땅은 용도에 맞게 활용해야 한다”며 “용산 부지는 미래세대가 단순히 먹고 잠자는 공간이 아니라 먹거리를 만드는 공간으로 조성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는 복합단지 재개발의 대명사인 뉴욕 맨해튼의 ‘허드슨 야드’처럼 개발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용산 개발 문제는 그동안 뜨거운 감자였다. 서울의 스카이라인을 바꿔놓을 국제업무지구 구상은 물거품이 됐다. 이곳에서 멀지 않은 곳에서 ‘용산 참극’이 빚어지기도 했다. 박 시장의 통째 개발론도 국토부의 반대와 집값을 자극할 것이라는 우려로 보류됐다. 일각에서는 ‘장밋빛’ 청사진에 매달리기보다 초고층 주상복합 개발이 현실적이라고 주장한다.
키는 인허권자인 서울시가 쥐고 있다. 서울시는 박 시장의 ‘통개발론’을 뒷받침하려는 듯 코레일 부지 개발 지침 마련을 위한 용역에 들어갔다. 이에 화답해 코레일은 내년 말 완공을 목표로 토지정화사업에 착수했다. 공교롭게도 대선 레이스와 맞물리는 시점이다. 코레일의 부지는 박원순표 ‘용산 마스터플랜’의 출발점이자 핵심축이다. 코레일 부지의 대담한 활용계획이 없으면 박원순표 용산 통개발은 ‘팥소 없는 찐빵’이나 다름없다. 민주당 내 기반이 약한 박 시장이 당의 요구를 뿌리칠 수 있을까. 가뜩이나 용산 통개발 구상이 부동산 정책에 발목이 잡힌 상황이다. 양준모 연세대 경제학부 교수는 “코레일 부지는 특정 세대가 아닌 국민 모두의 것”이라며 “경제 논리로 풀어야 하지 정치 잣대를 들이대면 안 된다”고 강조했다. 부동산의 정치화가 갈수록 심해지는 요즘, 용산 코레일 부지는 그 한복판에 있다. 박 시장의 선택이 주목된다.
/권구찬선임기자 chans@sedaily.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