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은 ‘핑크빛 광선’처럼 만져지거나 잡히지도 않으면서 아름답고 강렬하게 찾아든다. 문제는 그 속성 상 안정적이지도 않고, 영원하기도 어렵다는 점이다. 연애 하는 사람은 사랑으로 따뜻하고, 세상이 오묘한 아름다움으로 빛나며, 혼자 갑자기 콧노래를 흥얼거리기도 하지만 그것은 동시에 언제 미끄러질지도 모를 감정이며 전혀 생각하지 못한 지점에서 어긋나 끊어지고 끝나기도 한다. 화가 백현진(48)의 그림 ‘연애’는 그 어려운 사랑의 관계 미학을 다룬 듯 보이기도 한다.
용산구 회나무로 P21에서 ‘핑크빛 광선(P-ray)’이라는 제목으로 백현진의 개인전이 한창이다. 대형 회화부터 작은 드로잉과 설치작품 등 15점의 신작이 공개됐다. 핑크색 도는 작품에 먼저 눈이 간 것은 전시 제목 때문일지도 모른다. 착각하지 말자. 작가가 그림에 담은 뜻은 보는 이의 해석과 다를 가능성이 크며, 숨은 의도를 맞추는 것은 중요하지 않다.
“언어로는 할 수 없는 ‘무엇’을, 말 그대로 언어로 할 수 없기에 이미지나 소리로 다루는 것입니다. 이번 전시는 언어나 소리로 다룰 수 없는 그 ‘무엇’을, 그림으로 기록해 나타낸 경우입니다. 언어로 ‘작품 설명’이나 ‘작품 제목을 짓게 된 경위’를 말하는 것은, 제게 가능하지 않습니다.”
꽤 많은 현대미술가들이 작품 앞에서 “당신이 마음대로 생각하면 된다”고 말하는데, 백현진의 작품은 특히 더 그렇다. 다만 작가는 이번 전시 제목을 지을 시기에 개인적으로 새로운 관계에 대한 막연한 욕망이 있었다고 털어 놓았다. 그는 “‘핑크빛’이란 상투적 낱말이 머리에 맴돌고 그려지기도 했으며 동시에 그 ‘핑크빛 광선’은 신기루 같은 것이겠다는 사실도 느끼고 있었다”면서도 “중요한 것은 작업이나 제목에 대한 당신(관객)의 반응”이라고 강조했다.
실제 4점이 한 벽에 걸린 그의 ‘말할 수 없는’ 연작 앞에서 한 어린이 관객은 “집 앞에 놓인 택배 상자가 생각난다”고 말하는가 하면 20대의 남성 관객은 “모래시계의 흰 모래 위에서 식물을 키우는 것 같다”고도 했다. 정답도, 오답도 없다. 작가는 보편적이라 불리는 인간의 감정이라는 것도 실상은 모호하고 불안정한 생각으로 가득 찬 것임을 일깨운다. 그림을 매개로 교감하고 공감하려 애쓰는 것 만으로도 가치있는 감상이다.
백현진은 1세대 인디밴드 ‘어어부 프로젝트’로 유명하다. 홍상수 감독의 영화 ‘북촌방향’, MBC 드라마 ‘붉은 달 푸른 해’에도 출연하는 등 음악·미술·문학·공연 등을 경계없이 활동하는 다재다능한 작가다. 그는 홍익대 조소과에 입학했으나 제도권 교육에 회의를 느껴 음악으로 먼저 데뷔했다. 한때 미술을 더 해야 하나 고민하던 중 협업 차 만난 독일 출신 현대무용계의 거장 피나 바우쉬(1940~2009)가 “당신은 계속 그려야 한다”는 극찬의 격려를 받기도 했다. 화가로도 국내외 호평 속에서 활동 중이며 지난 2017년 국립현대미술관 올해의 작가 중 한 명으로 선정되기도 했다.
경리단길 위쪽에 자리잡은 P21은 지난 2017년 9월 중견작가 최정화의 전시로 개관전을 연 후 유승호·이형구 등 굵직한 작가들을 소개하고 있는 신생화랑이다. 최수연 P21대표는 지난 1983년 개관한 박여숙갤러리 박여숙 대표의 차녀다. 최 대표는 그간의 경험과 네트워크를 기반으로 해외 아트페어에도 적극적으로 한국 작가를 알리고 있으며 참가 심사가 까다로운 ‘아트바젤 홍콩’에도 올해 P21의 이름을 올렸다. 전시는 5월 5일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