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의 사실주의 화가 에드워드 호퍼가 아내 조세핀을 모델로 그린 ‘웨스턴 모텔’에 수수한 얼굴의 붉은 원피스 여인 대신 커다란 눈의 미인이 앉아있다. 곧 떠날 것만 같은 여행 가방과 어디든 데려다 줄 것 같은 녹색 자동차도 원작 그대로지만 관객을 빤히 바라보는 도발적인 여인의 눈동자는 낯설음과 친근함을 동시에 던진다. 건너편에는 오귀스트 르누아르의 ‘물뿌리개를 든 소녀’를 떠올리게 하는 큰 눈망울의 인형 같은 소녀가 서 있다. 원작의 분위기가 지배적이지만, 그림 속 소녀의 둥글게 뜬 눈은 뭔가를 ‘더 많이 알고 있는 듯’하다.
커다란 눈망울의 인형같은 얼굴이 특징인 일명 ‘아이돌(Eyedoll)’ 캐릭터로 유명한 작가 마리킴(43)이 명화와 만났다. 6일 서울 종로구 평창동 가나아트센터에서 개막한 마리킴의 개인전 ‘마스터피스’에서 작가는 지난해 미국 LA 전시에서 처음 시도한 명화 오마주 연작을 확장해 회화 25점, 조각 1점 등으로 선보였다. 마리킴은 걸그룹 투애니원(2NE1)의 앨범 재킷 작업 등을 통해 대중에게도 잘 알려져 있다.
구스타브 클림트가 그린 ‘마르가레트 부인의 초상’을 비롯해 그의 트레이트 마크가 된 ‘생명의 나무’도 마리킴 식 ‘아이돌’로 재탄생했다. 작가는 장 오귀스트 도미니크 앵그르가 그린 ‘오송빌르 백작 부인’과 스페인 궁정화가 디에고 벨라스케스의 ‘푸른 드레스를 입은 마르가리타 공주’, 프란시스코 고야가 그린 ‘옷을 입은 마하’와 ‘옷 벗은 마하’ 등 거장의 대표작들을 자신만의 방식으로 재해석했다. 하나같이 큰 눈과 둥근 얼굴이 도드라진다. 그간 디지털 이미지를 그대로 출력하는 방식으로 작업했다면 최근작에서는 프린트된 화면 위에 회화 기법을 덧입혀 예술과 기술의 접점, 오리지낼리티(원본성)의 근원을 되물었다.
전시장에서 만난 작가는 “‘유능한 예술가는 모방하고 위대한 예술가는 훔친다’고 한 피카소의 말”을 인용해 “예를 들어 보티첼리의 ‘이상적 여인의 초상’을 오마쥬한 작품은 수백 년 전 보티첼리의 그림 이미지를 구글에서 참고해 내 작품 특유의 얼굴을 그려 넣어 재생산한 것이며, 이는 전혀 다른 예술과 예술 행위이기에 보티첼리의 ‘예술’을 훔친 것은 아니다”라고 설명했다. 그는 “미술관에서만 볼 수 있던 죽은 예술가들의 명작을 이 시대의 기술과 상상력으로 현생하게 만들었다고 말하고 싶다”고도 덧붙였다.
전시의 묘미는 고려 불화를 오마주한 신작들이다. ‘수월관음도’에서는 관음보살이 큰 눈의 ‘아이돌’로 등장한다. 관음의 발치 아래서 구원을 공양하는 선재동자의 수더분한 얼굴은 그가 마치 미(美)를 갈구하는 것처럼 보인다. 전시는 31일까지.
/글·사진=조상인기자 ccsi@sedaily.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