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15년 5월 8일 새벽. 난공불락을 자랑하던 오사카성의 천수각이 불탔다. 물밀듯 몰려드는 도쿠가와 가문의 군대에 도요토미군은 속절없이 무너졌다. 임진왜란의 원흉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외아들로 가문을 다시 세우려던 도요토미 히데요리(27세)는 생모 요도도노(46세)와 함께 자결하며 생을 마쳤다. 한때 일본을 지배했던 도요토미 가문은 오사카 여름 전투로 불리는 이 싸움으로 대가 끊겼다. 대신 도쿠가와 가문의 위세가 굳어졌다. 이미 바쿠후(막부)를 열어 국왕 대신 실질적 권력을 장악한 도쿠가와의 시대는 개항과 유신까지 이어졌다.
오사카 전투의 배경은 도쿠가와 가문의 조바심. 아들 히데타다에게 쇼군(장군)직을 물려주고 은퇴한 도쿠가와 이에야스(72세)는 마지막 사업으로 도요토미 가문 멸절을 꼽았다. 일본의 패권을 둘러싼 일전인 세키가하라 전투(1600)에서 승리하고 바쿠후를 설치(1603)하며 실권을 잡았으나 언제나 옛 주군인 도요토미 가문이 눈에 걸렸다. 장손녀를 출가시켜 손녀사위가 된 히데요리를 칠 기회만 노리던 이에야스는 불교 사원의 종에 새겨진 문구를 구실삼아 1614년 10월 전국에 ‘역적 토벌령’을 내렸다.
히데요리는 넘치는 돈을 풀어 전국의 낭인들을 불러모았다. 세키가하라 전투 이후 석고( 石高·쌀 소출량)가 222만 석에서 65만 석으로 줄었어도 부친이 물려준 보물로 10만 병력을 모아 두 배가 넘는 도쿠가와군과 맞섰다. 방어 측이 완강하게 저항하던 겨울 전투의 끝은 성의 방어시설인 해자를 매립하는 조건의 강화. 히데요리는 고령인 이에야스가 죽을 때까지 기다리면 된다고 계산했으나 도쿠가와 가문은 강화조건 위반을 빌미 삼아 다시 침공해왔다. 재침 당시 병력 차이는 16만명 대 5만명. 서전에 반짝했던 방어 측은 전투 재개 이틀 만에 무너졌다.
승리한 도쿠가와 가문은 유력 다이묘(영주)들의 반란을 억제할 세 가지 장치를 만들었다. 성을 하나만 남기고 다 부수도록 강제(일국일성제)하고 지배층인 사무라이 계급의 권한과 의무를 법(무가제법도)으로 묶었다. 특히 참근교대제로 다이묘들의 반란을 원천적으로 막았다. 참근교대제란 다이묘가 1년은 영지에서 1년은 수도인 에도(현 도쿄)에서 근무하는 제도. 다이묘가 영지에 있을 때는 가족이 인질로 에도에서 살았다. 260여 명의 다이묘가 2년마다 수행원 수백~수천 명을 이끌고 수도를 오가는 통에 도로와 도시가 번성하고 유통 경제가 싹 텄다. 영국과 네덜란드제 대포가 동원된 오사카 전투는 일본 근대 경제를 향한 이정표였다.
/권홍우선임기자 hongw@sedaily.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