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의기억연대(정의연)가 촉발한 ‘깜깜이’ 회계 문제가 시민단체 전반에 퍼져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수십억원의 성금을 쓰면서 사용처를 밝히지 않거나 기부금 수혜인원을 뻥튀기하는 것은 물론 매달 모금한 돈과 지출한 돈이 일치하는 등 회계 처리가 불투명한 사례가 다수 발생하고 있는 것이다. 전문가들은 세무당국이 나서서 작은 규모의 시민단체라도 자발적으로 외부 감사를 받도록 유도해야 한다고 설명했다.
13일 국세청 공익법인 공시에 따르면 다수 시민단체들이 내놓은 결산자료에서 회계 부실 의심 사례가 나타나고 있다.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이용수 할머니의 증언으로 논란에 휩싸인 정의연과 같은 ‘깜깜이 회계’가 시민단체 전반에 퍼져 있는 것이다. 시민들의 성금으로 운영되지만 모금액 100억원 미만이라 외부회계감사를 받지 않는 시민단체들 중에서 이와 같은 주먹구구식 회계처리를 하는 곳이 많다.
대표적인 사례는 기부금 집행으로 인한 수혜 인원을 뻥튀기하는 것이다. 국세청에 따르면 사단법인 한국여성단체연합은 지난해 3억 7,421만원을 ‘여성인권향상과 성 평등 증진’ 사업에 사용하면서 해당 기부금 집행으로 수혜를 받는 인원이 5,100만 명이라고 공시했다. 관련 사업으로 여성 인권이 향상되면 우리나라 국민 전원이 혜택을 보게 된다는 취지에서 수혜 인원을 과도하게 늘려 계산한 것으로 분석된다. 이는 정의연의 전신이라고 할 수 있는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정대협)가 위안부 문제 연구 및 교육사업을 하면서 수혜인원을 ‘99명’, ‘999명’, ‘9,999명’으로 작성한 것과 유사한 방식이다. 이외에 동물권행동 카라의 경우에도 사업 수혜인원이 2015년 1명에서 지난해 1만 50명으로 급증했다.
수십억원의 성금을 쓰면서 사용처를 제대로 밝히지 않는 경우도 있다. 국세청에 따르면 녹색연합의 지난해 기부금품의 모집 및 지출 명세서를 살펴보면 연간 22억 7,137만 원을 쓰면서 어디에 돈을 사용했는지를 명확히 밝히지 않았다. 명세서에는 녹색법률사무소와 한 개인의 이름으로 표시된 사용처에 각각 8억 3,392만원과 14억 3,745만원을 지급했다고 기록돼 있지만 자세한 사항은 나와 있지 않다. 일반법인이나 기관에서 업무추진비 등을 사용하면 쓸 때마다 영수증을 남겨 보관하는 것과 비교하면 허술한 절차에 기반해 돈을 사용하고 있는 것이다. 이 역시 정의연이 한 술집에서 모금행사를 하면서 3,000만원이 넘는 돈을 사용했다고 결산자료에 기술한 것과 비슷한 사례다.
여성·환경단체가 아닌 보수적 시민단체들도 상황은 비슷하다. 국세청에 따르면 한국자유총연맹의 지난해 기부금품의 모집 및 지출 명세서를 살펴보면 1년 12개월 모두 매달 기부금의 수입과 지출이 일치하는 것으로 기록돼 있다. 통상적으로 규모가 있는 법인을 운영하면 매달 수익과 지출에 차이가 발생해 잔액을 다음 달과 내년으로 넘겨서 사용하는 게 보통인데 한국자유총연맹의 경우 이월되는 금액이 전혀 발생하지 않았다. 주먹구구 회계로 의심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국내 대표 보수단체로 꼽히는 한국자유총연맹은 지난 2017년 김경재 전 총재가 박근혜 전 대통령의 탄핵 반대 집회에서 관제데모를 한 혐의를 받아 논란이 된 적이 있다.
전문가들은 정의연 논란을 통해 시민단체들의 회계 부실이 확인된 만큼 국세청을 비롯한 세무당국이 대책을 세워야 한다고 설명했다. 이한상 고려대 경영학과 교수는 “정의연이 주목을 받아서 그렇지 운용자금이 30억원이 넘는 공익법인 중에서도 회계서류가 제대로 작성되는 곳이 거의 없다”고 지적했다. 실무진 부족 등 열악한 시민단체들의 사정을 고려했을 때 회계 전문가를 고용하는 게 쉽지 않은 만큼 정부가 나서서 방안을 찾아야 한다는 설명이다. 참여연대 공동집행위원장을 지낸 경제민주주의21 대표 김경율 회계사는 “국세청이 시민단체를 관리·감독할 유인이 부족해 회계가 잘못돼도 제지할 방법이 없다”며 “회계 서식에서 통일된 수칙 등 혼선을 정리하는 것부터 시작해야 한다”고 설명했다. 세무당국의 역할 강화는 시민단체의 관제화를 불러올 수 있기 때문에 시민단체들이 자발적으로 외부감사를 받게 해야 한다는 의견이다. 이 교수는 “기부금 10억원을 받아 감사 비용으로 2,000만원이 사용됐다 하더라도 기부자들은 이해한다”며 “시민단체들이 스스로 돈을 들여 외부감사를 받는 게 가장 적합하다”고 설명했다.
/이경운·한민구 기자 cloud@sedaily.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