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퇴 뒤 1년간은 몸무게가 좀 많이 늘었는데 지금 체중은 4년 전 올림픽 때와 거의 비슷한 것 같아요. 물론 근육량 차이는 크겠지만….”
전 리듬체조 국가대표 손연재(26)는 경기복을 벗은 지 4년이 다돼가는데도 현역 선수 때와 다름없다는 말을 많이 듣는다. 복고 열풍을 타고 TV 예능 프로그램 ‘무한도전’의 과거 출연편이 유튜브를 통해 다시 인기를 끌면서 손연재의 ‘방부제 외모’에 대한 대중의 관심은 더 커졌다. 10년 전인 열여섯 살 때 촬영한 것이라고 하면 화들짝 놀라는 사람이 많다.
외모는 4년 전이나 10년 전과 비교해도 거의 달라진 게 없지만 손연재는 그동안 많은 변화를 겪었다. 17년간의 선수생활에서 은퇴한 후 손연재는 리듬체조 스튜디오를 차려 수강생들을 가르치고 있다. 청소년 대상 강연에 나서는가 하면 초청코치 자격으로 국내외 리듬체조 대회를 참관하기도 한다. 국제대회 주최 관련 업무도 소홀히 할 수 없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의 여파로 활동반경이 좁아지기는 했지만 매일 일과를 소화하는 것만으로도 살찔 겨를이 없을 것 같다.
손연재가 하루 중 가장 많은 시간을 보내는 서울 용산구의 리프스튜디오에서 최근 그를 만났다. 손연재와 네 명의 강사가 근무하는 이곳은 건물의 2개 층을 쓰는 리듬체조 교습소다. 문을 연 지 1년이 조금 넘었는데 수강생이 거의 100명이다. 처음에는 아이들이 대부분이었다가 최근 들어 성인 수강생이 많이 늘었다. 이날 손연재는 마이클 잭슨의 음악에 맞춰 구성한 안무를 강사들과 연습하고 있었다. 선수 시절의 그는 리본의 움직임이 멈추는 순간 감점인 6m 수구를 다루느라 항상 긴장을 놓을 수 없었지만, 채점에서 자유로워진 지금은 한결 편안해 보였다. 손연재는 “리듬체조와 춤을 섞은 ‘리본안무’라는 새 장르를 만들어 주로 성인 수강생분들에게 알리고 있다. 운동요소와 예술요소가 모두 들어 있어 쉽고 흥미롭게 배울 수 있다”고 소개했다.
현역 시절 ‘리듬체조 요정’으로 통했던 손연재는 스튜디오 수강생들에게는 ‘연재쌤’, 대외 업무 때는 ‘손 대표님’으로 불린다. 선생님과 대표님이라는 호칭이 제법 익숙해졌다는 그는 “어릴 때는 ‘대표님’ 하면 마냥 멋있을 거라고만 생각했는데 지금은 뭐랄까, 굉장히 무거운 말이라는 것을 매일 실감한다”고 했다. 이름처럼 자주 불렸던 ‘요정’이라는 별명에 대해서는 “그때나 지금이나 깊게 생각해보지 않아서…”라며 수줍게 웃어 보였다.
손연재는 선수 시절부터 다양한 방송과 광고를 통해 일반 시청자들을 만나왔던 터라 은퇴 뒤 방송일을 전업 삼을 것으로 자연스레 예상됐다. 하지만 손연재는 간간이 TV 프로그램에 얼굴을 비칠 뿐 ‘스포츠 스타 출신 연예인’의 길을 가지는 않았다. “선수 때는 촬영 일정이 정말 많았던 것 같아요. 덕분에 해외 전지훈련에 도움이 되기도 했고요. 그런데 방송은 하면 할수록 제 성격에는 어렵더라고요.” 무엇보다 리듬체조로 하고 싶은 일이 더 많았다. 손연재는 “리듬체조는 대중화할 수 있는 요소가 충분히 많은 운동”이라며 “아이부터 어른까지 다양한 연령층에 리듬체조를 알리고 싶었다. 대외 활동도 그쪽으로 초점을 맞춰 부지런히 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리듬체조도 요가나 필라테스처럼 대중화할 수 있다고 믿는 그는 “몸을 깨워주고 몸의 선을 만들어주는 운동이다. 유연성과 근력이 저도 모르게 좋아진다”고 리듬체조 예찬론을 펼쳤다.
다섯 살에 취미로 시작해 초등학생 때부터 본격적으로 선수의 꿈을 키웠으니 어림잡아 20년간 놓지 않은 운동이다. 손연재는 “돌아보면 힘들고 부담스럽기만 한 대회가 너무 많았다. 하지만 엄청난 긴장감과 부담감을 이겨내고 끝냈을 때 오는 기분은 정말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것이어서 그런 느낌이 그립기도 하다”고 털어놓았다. 대신 경쟁의 틀에서 벗어난 리듬체조는 손연재에게 새로운 즐거움을 주고 있다. 그는 “가장 힘들고 괴로운 종목이 리본이었는데 지금은 가장 표현하기 좋고 많은 분들이 호응해주시는 게 바로 리본이다. 선수 때 없던 여유를 가지고 표현해내고 있다”고 했다. 가요나 팝 음악에 맞춘 손연재의 리본안무 영상은 유튜브·인스타그램의 인기 콘텐츠다. 은퇴 후 전문적으로 춤을 배운 손연재는 이를 바탕으로 한 달에 2~3개씩 리듬체조 안무를 짜 영상을 찍고 수강생들에게도 가르친다.
2018년 자비를 들여 처음 연 주니어 리듬체조 국제대회 리프 챌린지컵은 올해 3회째를 앞두고 있다. 주니어 꿈나무들에게 경험을 심어주기 위해 기획·운영에 지도·출연까지 손연재가 1인 다역을 맡은 대회다. 손연재는 “대회에 참가만 하던 선수였다가 주최 측이 되고 보니 대회를 준비하고 여는 분들의 입장이 이해가 되더라. ‘정말 많은 분들이 고생하는구나’ 하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면서 “올해는 코로나19의 영향으로 준비가 조금 더딘 상황이지만 여의치 않으면 국내 대회로라도 명맥을 이어갈 것”이라고 강조했다. 그는 “선수의 길을 가고 싶어도 훈련할 곳이 없어서 그만두는 친구들이 많다. 제대로 연습할 체육관이 거의 없고, 있다고 해도 1~2시간 쓰고 비워줘야 한다”며 “외국 유학 갈 형편이 안 되면 포기할 수밖에 없는 구조적인 문제가 있다”고 국내 리듬체조 환경을 꼬집기도 했다. 손연재도 세종고 1학년 때 러시아로 홀로 유학을 떠나 5~6년을 외롭게 버텨냈다.
대회 준비와 관련한 외부미팅 때 말고도 손연재는 정장을 입을 일이 꽤 많다. 전국 각지에서 강연 요청이 잇따르기 때문이다. 주로 청소년 대상 행사에서 손연재를 찾는다. 한 행사에서 무대에 오른 손연재는 “선수 시절 경기 직전에 너무 긴장되고 불안할 때는 머릿속으로 드라마를 쓰곤 했다. 메달을 땄다는 기사를 흐뭇하게 확인하는 장면, 인터뷰하면서 주변에 감사인사를 전하는 모습 등을 디테일하게 그려보면 불안한 마음이 조금씩 사라지더라”고 경험담을 들려줬다. 그는 “처음에는 강연한다는 것 자체가 부담스러웠지만 몇 번 해보니 오히려 제가 청중에게서 좋은 영향을 받는 느낌”이라고 밝혔다. “구체적인 꿈을 설정해야 한다는 압박, 당장 잘해야 한다는 조급함을 버리면 좋을 것 같다는 내용으로 얘기를 풀어가는 편인데 교복 입은 친구들과의 눈맞춤에서 뭔가 기분이 좋아지는 느낌을 받는다”고 한다.
선수 때 메달 획득의 드라마를 늘 그렸던 손연재가 지금 머릿속으로 쓰고 있는 드라마는 어떤 내용일까. “새로운 분야에 도전하면서 모든 일에 책임감 있게 임해야 한다는 생각을 놓지 않은 것 같아요. 그런 과정에서 인간 손연재로서 제법 성장했다는 뿌듯함도 있지만 아직 배울 게 많죠. 지금 하고 있는 일에 조금 더 여유가 생기고 자리도 잡아서 스스로 어른이 된 것 같다고 인정하는 모습을 상상하고 있어요.”
사진=권욱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