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리하되 평등하다(separate but equal).’ 1896년 5월18일 미국 연방대법원의 ‘플레시 대 퍼거슨 사건(Plessy v. Ferguson)’ 판결문 골자다. 법이 대놓고 흑백 차별을 인정한 이 판결은 미 사법 역사를 통틀어 최악 판결의 하나로 손꼽힌다. 소송의 발단은 1892년 6월 초 루이지애나주의 한 기차 안에서 일어났다. 제화공 겸 시민운동가 호머 플레시(30세)는 예약했던 일등석에 앉아 자신이 흑인이라고 밝혔다. 흑인 피가 8분의1(octoroon)인 그는 외모로는 백인과 구분이 어려웠으나 주 법률과 기차 회사 규정에 따라 일등석에 탈 수 없었다.
열차 안에 흑인 칸과 백인 칸을 따로 설치하고 일등석에는 백인만 탈 수 있었기 때문이다. 호머는 흑인 칸으로 이동하라는 차장의 종용에도 자리를 지켰다. 결국 열차 보안관에 체포돼 벌금을 물고 재판을 받았다. 루이지애나 주법원 1심에서 퍼거슨 판사는 주가 1890년 흑백분리를 규정한 열차 법 위반이라며 25달러 벌금형을 매겼다. 호머는 흑인인권단체와 함께 항소했으나 루이지애나 대법원도 같은 판결을 내렸다. 호머의 변호인단은 인종차별을 금지한 수정헌법 13조·14조 위반이라며 사건을 연방대법원에 올렸다. 최종심에서 연방대법관들은 7대1(1명은 개인사로 불참)로 퍼거슨 판사의 손을 들어줬다.
남북전쟁으로 일시적인 자유를 얻었던 흑인들은 플레시 판결로 법이 보장하는 차별에 시달렸다. 상황이 이 지경에 이른 이유는 1877년 연방군의 남부에 대한 군정이 끝나고 주 정부의 권력을 찾은 토착 백인들의 횡포를 연방정부와 대법원이 눈감았던 탓이다. 시간이 흐를수록 연방대법원은 거꾸로 갔다. 1883년에는 수정헌법 14조가 오직 정부 활동에만 국한된다고 판결해 백인의 흑인에 대한 폭행(사적 린치)이 난무하게 만들었다. 의회가 통과시킨 흑백차별금지법도 대부분 위헌으로 낙인찍었다.
플레시 판결 이후 차별은 더 심해졌다. 남부의 여러 주는 경쟁적으로 ‘한 방울 법(one rule)’을 제정해 흑인을 따돌렸다. 유색인종의 피가 한 방울이라도 섞였으면 백인이 아니라는 것이다. 흑인들은 차별의 땅, 남부를 벗어나기 어려웠다. 북부는 흑인을 수용할 의지도 역량도 없어 가족과 땅이 있는 남부에 머물며 차별과 폭압을 견뎠다. 흑인 대통령까지 뽑았지만 아직도 차별은 여전하단다. 우리는 얼마나 떳떳할까. 다문화 가정과 조선족, 새터민과 저소득층을 아래로 보는 천박한 우월감에 사회가 병 들어간다.
/권홍우선임기자 hongw@sedaily.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