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81년(고종 18년) 5월 19일, 최초의 근대식 군대인 ‘교련병대’(속칭 별기군)가 새로 생겼다. 서울과 외곽을 방어하는 중앙군(5군영)에서 젊고 튼튼한 80명을 뽑아 일본 공사관 소속 호리모토 공병 소위에게 훈련을 맡겼다. 급료나 피복 지급에서 좋은 대우를 받은 이들은 구식 군대의 시기를 받았다. 계속된 차별은 임오군란으로 터져 호리모토 소위가 피살되며 교련병대 역시 창설 14개월 만에 폐지되고 말았다. 여기까지가 각종 교과서에 실린 ‘별기군’에 관한 내용이다. 사료가 많지 않지만 실상은 보다 복잡하다.
무엇보다 명칭이 적합하지 않다. 예전부터 ‘별기군’이 있었다. 조선왕조실록에는 정조 시절부터 기록이 나온다. 임진왜란에서도 운용됐다. 고려 시대의 삼별초와 같은 일종의 특수부대 성격이 강했다. 당시의 정식 명칭은 교련병대(敎鍊兵隊). 세간에서는 ‘왜별기(倭別技)’라고 불렀다. 일제강점기에 조선사편수회에서 ‘왜(倭)’를 빼고 역사를 서술한 게 ‘별기군’으로 굳어졌지만 정확하지 않은 호칭이다. 잘못된 것은 이름뿐만이 아니다. 조선은 군대끼리 반목했으며 신식 군대를 맡았던 대부분 지휘관들은 역적의 행태를 보였다.
뒤늦게 국방력 건설의 필요성을 깨달은 조선이 먼저 기댄 나라는 청(淸). 근대식 군사훈련부터 병기 제조술 습득까지 일체를 청에 맡겼다. 청의 교관을 초빙할 무렵, 일본이 끼어들었다. 공사관에 근무하는 군인을 교관으로 쓰면 추가 경비가 필요 없다는 말에 청에 대한 의존 심화를 걱정하던 고종이 넘어갔다. 청에 파견한 영선사의 체류 비용이 없어 도중에 귀국시킬 만큼 조선의 경제력은 허약했다. 쪼들리는 살림 속에서도 교련병대는 규모를 키우고 사관생도까지 자체 모집하는 등 발전을 꾀했으나 임오군란에 막혔다.
고종이 친정 직후 창설한 무위소에 대한 특별 대우에 5군영 병사들의 불만이 높았던 터. 더 높게 대우받는 교련병대는 포도청 습격 등 행패로 민원까지 샀다. 누적된 차별에 터진 구식 병사들의 분노(임오군란)에 백성들은 박수를 보냈다. 교련병대는 일단 해산됐으나 신식 군대는 완전히 없어지지 않았다. 청나라가 교관과 무기를 댄 청별기, 러시아 교관이 초빙된 러시아별기에서 수천 명씩 군사훈련을 받았다. 문제는 이들이 ‘강병 육성’ 취지와 달리 나라에 해를 끼쳤다는 점. 교련병대 출신 장교들은 명성황후 시해에 앞장섰다. 청별기는 동학군을 죽이고 갑신정변을 무너뜨렸다. 위기 속에서 없는 돈 들여 키운 군대가 외세에 휘둘리고 군인들은 자기 살길만 찾은 결과는 익히 아는 대로다. 망국(亡國).
/권홍우선임기자 hongw@sedaily.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