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은 대형마트가 그 역할을 대신하고 있지만 19세기 말 조선의 ‘오일장’에는 없는 게 없었다. 햇빛 가리개를 얹은 점포들은 생선,쌀,소금 등의 식품부터 그릇,경대,베개 등의 잡화도 판다. 소를 데리고 나온 우시장이 있는 것을 보면 오일장 중에서도 규모가 큰 축에 속한다. 뿐만 아니라 엿장수·닭장수·새장수·지게꾼도 있었으니 사진도 남지 않은 그 시절을 증언해 주는 것은 그림 한 장, 바로 기산 김준근의 풍속화다.
국립민속박물관이 20일부터 특별전 ‘기산 풍속화에서 민속을 찾다’를 개최한다. 김준근은 단원 김홍도나 혜원 신윤복에 비해 유명세도 낮고 언제 태어나 어디서 사망했는지조차 불분명한 수수께끼같은 인물이지만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 부산 초량, 원산, 인천 등 개항장에서 활동하며 수출용 풍속화를 대거 그린 것으로 알려져 있다. 현재 전하는 1,496점의 김준근 풍속화 중 우리나라에 현존하는 것은 298점일 뿐, 영국·독일 등 유럽에 878점, 미국과 북미에 138점이 소장돼 있는 것을 보면 김준근은 풍속화 ‘한류’의 선봉장이었다. 국내 최초의 번역 문학서 ‘텬로력뎡’(천로역정·天路歷程)의 삽화를 그린 이가 바로 김준근이었다. 그림과 자료 등 340여 점을 선보인 이번 전시는 김준근의 풍속화만 160여 점을 모은 전례 없는 자리라 눈여겨 봐야 한다. 특히 독일 MARKK(옛 함부르크민족학박물관) 등 해외 소장품 150여 점을 대여해 왔는데,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 확산을 우려해 호송관 없이 유물만 단독으로 항공운송 하는 등 우여곡절이 많았다.
시장 풍경 등 상업이 발달해 도시가 형성되고 교역이 빈번했던 조선 후기의 모습은 활기차다. 교육을 주제로 한 그림으로는 서당과 훈장의 수업장면뿐만 아니라 과거 급제자가 사흘에 걸쳐 스승과 선배 급제자 등에게 인사하러 다니는 ‘신은(新恩)’ ‘신래(新來)’ 등이 눈길을 끈다. 오늘날의 ‘신고식’처럼 예비 공무원인 급제자를 놀리는 모습도 있다. 결혼에 관한 풍속화는 예물 보내는 모습부터 신랑이 처음 신부집으로 찾아가는 친영 행렬, 초례, 신부 행렬에 이르기까지 혼례 과정 전체를 장면별로 보여준다. 장례의식도 죽은 사람을 병풍 뒤에 눕혀놓고 통곡하는 ‘초혼’이나, 풍수가와 함께 장지를 보러 나서는 상주가 부모 여읜 죄인이라는 뜻으로 방갓을 써 얼굴을 가린 모습, 효자가 묘소 옆에 여막을 짓고 삼년상을 하는 ‘시묘살이’ 모습 등 진귀한 장면들이 시선을 끈다. 체계적으로 기록된 왕실문화와 달리 구전과 자료로만 전하는 조선 후기 평민들의 일상을 시각적으로 보여주는 사료들이라 가치가 크다.
이 외도 사람이 모이는 시장에서 펼쳐지던 소리꾼, 굿중패, 솟대장이패의 갖가지 연희와 갓·망건·탕건·바디·짚신·붓·먹·옹기·가마솥 만드는 수공업 과정을 볼 수 있다. 널뛰기·그네뛰기·줄다리기·제기차기 등의 세시풍속은 신나지만 주리 틀고 곤장 치는 형벌제도는 혹독하다. 평양기생학교와 기생의 검무 장면도 볼 수 있다. 검무의 경우 신윤복의 ‘검무도’에 비해 표현력은 떨어지는 편이나 복식과 구도 등은 흡사해 당시의 모습을 재구성하기에 충분하다
마침 국립중앙박물관도 상설전시관 2층에서 풍속화의 거장 김홍도의 ‘단원풍속도첩’을 전시 중이다. 첫 전시에서는 씨름, 무동. 논갈이, 활쏘기, 노상 풍경, 베짜기, 그림 감상 등 7점을 먼저 선보인다. 서민들의 놀이 문화를 그린 ‘씨름’과 ‘무동’은 김홍도의 작품 중에서도 명작으로 꼽힌다. 논갈이는 힘든 농사일 중에도 활기찬 서민들의 삶을 엿보게 한다. ‘활쏘기’는 침착한 표정의 교관이 활쏘는 인물의 자세를 교정해주는 모습 등 인물 간의 관계묘사가 흥미롭다. ‘그림감상’의 경우 그림을 감상하는 것일 수도 있으나 과거를 마친 응시자들이 심각한 표정으로 정답을 맞춰보는 장면이라는 등 분석이 다양하다. 선의 필력이 떨어지고 구불거리는 옷주름 등이 어색해 김홍도의 원본을 모사한 것이라는 견해도 있다. 내년 5월까지 일 년간 전시하며 2차례 교체전시로 총 19점의 화첩 수록작 모두를 보여준다. 조선시대 사람들의 그 때 그 시절, ‘라떼는 말이야’을 볼 수 있는 좋은 기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