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0년 5월26일 오후7시, 윈스턴 처칠 영국 총리가 ‘다이너모 작전’ 실행명령을 내렸다. 파죽지세의 독일군에 쫓겨 프랑스의 작은 항구 됭케르크에 몰린 영국군과 프랑스군을 구출하는 작전이 시작된 것이다. 처칠의 명령 이전에 이미 2만8,000여명이 철수를 시작했으나 속도는 극히 더뎠다. 당초 계획은 이틀간 영국군 4만5,000명 철수 완료. 실적은 첫날 7,669명, 둘째 날 1만7,804명 등 2만5,473명으로 계획 대비 57%를 밑돌았다. 그래도 희망이 생겼다. 민간 선박들이 적극 나선 덕분이다.
결과적으로 기적이 일어났다. 6월4일까지 9일 동안 빠져나온 병력이 33만8,226명. 애초 생각보다 7.5배나 많은 장병이 살아 돌아왔다. 철수 직전 영국은 절망적인 상황. 히틀러 침략에 맞서 3개 군단 10개 사단을 노르웨이·프랑스·벨기에로 보냈으나 궤멸 직전이었다. 장병들의 생환을 국민이 직접 거들었다는 자부심은 독일과 싸워 이길 수 있다는 희망의 불씨를 지폈다. 전시 내각 총리에 임명된 지 16일 만에 철수 작전을 단행한 처칠의 리더십 아래 영국은 똘똘 뭉쳤다. 독일과의 화평 교섭론은 자취를 감췄다.
영국이 아직도 국난 극복의 상징으로 여기는 ‘됭케르크 정신(Dunkirk spirit)’을 만든 것은 독일 공군의 폭격에도 자발적으로 나선 860여척의 소형 선박이다. 부자들은 호화 요트를, 어부는 어선을 몰고 정원의 30배까지 장병들을 태웠다. 영국 해군은 실습용 목선을 끌고 나타난 학생들을 돌려보내려 진땀을 뺐다. 민간 선박들은 함대 기함에만 올라가는 ‘성 조지 해군기’를 달고 장병들을 태웠다. 마치 함대 사령관처럼. 해안에서 민간 소형 선박을 타고 됭케르크를 빠져나온 병력은 9만8,671명. 전체의 29.2%에 못 미쳤으나 이들 덕분에 좁은 됭케르크 항구에서 효율적 탑승이 이뤄졌다.
갑자기 좋아진 날씨와 독일의 판단 착오도 기적을 거들었다. 독일군이 3일간 진격을 멈춘 이유는 여전히 미스터리의 영역에 남아 있다. 협상을 위한 히틀러의 밑밥이라는 설과 길어진 보급선을 우려한 독일군 수뇌부의 오판이라는 설이 유력하다. 잘 알려지지 않은 ‘아라스 전차전(5월21일)’도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소규모 영국군 전차부대가 잠시나마 선전한 전차전이 대규모로 재연할 경우를 두려워한 독일군이 잠시 숨을 골랐다는 것이다. 영국은 철수 작전에서 막대한 장비를 상실했으나 정예부대를 간직한 덕분에 반격을 꾀할 수 있었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가장 중요한 자산은 사람이다.
/권홍우선임기자 hongw@sedaily.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