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03년 5월 27일, 러시아 네바강 하구 삼각지. 광활한 뻘과 늪에 인부들이 거대한 나무와 석조 기둥을 박았다. 도시를 세우기 위해 기반 다지기에 들어간 것이다. 당초 목적은 군사 도시 건설. 최전방에 요새를 세워 스웨덴을 견제하려는 차르(황제)의 생각에 반대가 많았다. 불과 한 달 전에 획득한 점령지에 큰돈을 들일 필요가 없다는 신하들의 반대론은 31세 젊은 차르 표트르의 의지에 바로 꺾였다. 표트르는 성당 두 곳을 먼저 짓고 요새에 ‘페트로파블로프스크’(베드로와 바울의 요새)라는 이름을 붙였다.
이듬해 인근 스웨덴 기지까지 점령해 항로 통제권을 확보한 러시아는 도시 건설 속도를 높였다. 해군 본부 건립을 시작으로 조선소와 군항이 세워지고 궁전도 들어섰다. 차르가 원했던 신도시의 모습은 베니스와 암스테르담. 선진문물을 습득하려 18개월 동안 유럽 각국을 여행했던 차르는 전 유럽에서 약 1,000명의 건축가와 기술자들을 불러들였다. 네덜란드인이 이탈리아풍으로 설계한 도시 건설에는 어려움이 많았다. 척박한 네바강 하구는 걸핏하면 바닷물이 들이치고 차가운 북풍이 휘몰아쳤다.
난관은 차르의 의지로 넘었다. 차르는 공사 현장에 머물며 인부들과 함께 돌을 날랐다. 전국의 석조 건물 건축을 금지해 모든 자원을 신도시에 쏟아부었다. 러시아 전역에 동원된 농노와 스웨덴 포로 수십만이 동원된 공사가 일단 마무리된 시기가 1712년. 9년 동안 100여 개의 섬을 365개 다리로 연결하며 약 15만 명이 목숨을 잃은 것으로 추정된다. 차르는 완성된 도시를 성 베드로에게 봉헌한다며 ‘상트페테르부르크’라고 불렀다. 실제로는 자신의 이름을 도시에 새긴 차르는 가족과 함께 모스크바를 떠나 신도시에 눌러앉았다. 최전방의 습지는 제국의 수도가 됐다.
제정 러시아의 수도로 200여 년 동안 번성한 상트페테르부르크는 1914년 상트페테르그라드로 이름이 바뀌었다. 독일과 전쟁을 치르던 차르 니콜라이 2세가 독일어 ‘부르크’를 떼어낸 것이다. 1924년 레닌 사망 직후 소련은 이름을 ‘레닌그라드’로 고쳤다. 소련이 해체될 때(1991년) 상트페테르부르크라는 이름을 되찾은 이 도시는 모스크바에 이어 러시아 2위이자 인근 항구를 포함해 최대의 무역항으로 자리 잡았다. 19세기 러시아의 문호 알렉산드르 푸쉬킨은 시 ‘청동기사(1833)’에서 도시와 역사에 대한 자부심을 이렇게 읊었다. ‘이곳에 도시가 세워지리라./자연은 우리에게/ 이곳에 유럽을 향한 창을 뚫고/ 해안에 굳센 발로 서라는 운명을 주었도다.’
/권홍우선임기자 hongw@sedaily.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