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업가일까, 사상가일까. 황철주(61·사진) 주성엔지니어링 회장은 ‘기술독립’이나 ‘벤처 시조새’와 같은 단어를 먼저 연상하게 하지만, 최근 만난 그는 사상가에 가까웠다.
31일 서울경제와 만난 황 회장은 두 개의 명함을 내밀었다. 하나는 주성엔지니어링 회장, 나머지는 한국청년기업가정신재단 이사장이다.
처음 나온 단어도 기업가 정신이었다. 황 회장은 “오늘의 대한민국을 만들어온 ‘헝그리 정신’은 수명을 다했다”고 말했다. 그는 “먹을 게 없던 시절, 전 국민이 먹고사는 게 최고의 화두였던 시절에는 헝그리 정신이 통했지만 이제는 (헝그리 정신이) 더 이상 통하지 않는다”며 “달라진 시대에 맞게 헝그리 정신을 대체할 그 무엇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한국전쟁으로 폐허가 된 대한민국이 짧은 기간 내 세계 11위의 경제 대국이 된 것은 헝그리 정신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지만, 이제는 과거처럼 헝그리 정신으로 밤새 일하고 토·일요일도 없이 죽기 살기로 일만 하면 되는 시대가 아니라는 것이다.
삼성의 이병철 회장이나 현대의 정주영 회장 같은 경제 거목들이 있는데 굳이 기업가 정신을 찾으려는 이유는 뭘까. 기업가 정신은 시대에 따라 달라지는 것일까.
황 회장의 대답은 명료했다. 그는 “이병철·정주영 회장과 같은 창업자는 나름 시대를 반영하는 기업가 정신이 있었다”며 “그러나 2~3세로 넘어가면서 시대는 바뀌는데 기업가 정신은 과거에 머물러 있다”고 말했다. 이어 “기업가 정신은 사람마다 생각하는 게 다 다르다”며 “한 사람이 (기업가 정신은 이렇다라고) 생각한다고 해서 정신이 되는 게 아니듯이 지금의 대한민국이 담아낼 기업가 정신이 무엇인지 찾는 게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황 회장은 “구체적으로 정의된 기업가 정신은 없다”면서도 자신이 생각하는 기업가 정신은 있다고 했다. 그가 내민 한국청년기업가정신재단 이사장 명함 뒷면에는 다섯 가지 기업가 정신이 새겨 있다. ‘1. 혁신과 성공의 지도를 작성 2. 시대에 맞는 기준을 재정립 3. 성공을 위한 판단과 결정 4. 리스크를 책임지고 극복 5. 성공·행복·희망을 공유’
그는 “개인적인 기준”이라며 선을 그었지만 “기업가 정신을 시대에 맞게 재정립할 필요가 있다”고 거듭 강조했다.
긴 설명이 이어졌다. “우리나라가 소득 3만달러까지 성장하는 데는 기업들의 기여가 컸지만 사회로부터 존중과 존경을 못 받고 있습니다. 기업들이 돈을 벌어 성공은 했지만, 직원들의 행복을 위해서는 인색했던 게 원인입니다. 과거에는 (생존이 급해) 기업가 정신이 뭔지를 고민할 여유가 없었겠지만 이제는 기업들이 존중과 존경을 받을 수 있도록 시대에 맞는 기업가 정신을 만들어내야 합니다.”
한국전쟁 후 세계에서 가장 최빈국이었던 대한민국. 그때는 ‘빵’을 위해 헝그리 정신으로 일했다면 이제는 빵보다 개인의 행복을 위해 일하는 시대가 됐기 때문에 과거와는 다른 변화된 기업가 정신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그가 10년 전 재단을 만들고 기업가 정신을 교육하고 알리는 데 매달리는 이유다.
황 회장은 “19세기 이전까지만 해도 미국의 기업이나 기업인들은 지금처럼 존중과 대우를 받지 못했다”며 “이 시대에 맞는 기업가 정신이 무엇인지에 대한 고민과 철학 없이는 (아무리 잘나가는 기업이라도) 궁극에는 (사회로부터) 버림을 받을 것”이라고 경고했다.
그는 기업인의 리더십도 바뀌어야 한다고 했다. 그는 “국민소득 3만달러까지는 무리의 뒤에서 ‘앞으로 돌격’ 명령만 내리면 됐지만 지금은 ‘나를 따르라’며 앞에서 무리를 이끄는 리더가 필요하다”며 “뒤에 서서 ‘돌격, 앞으로’라고만 외치면 누가 (이 말을 따라) 앞으로 나아가겠느냐”고 반문했다. 가난을 벗어나기 위해 ‘빵’을 쫓아 낭떠러지라도 달려갔던 과거와 소득 3만달러 시대의 삶의 목표 자체가 다르다는 것이다. 황 회장은 “기성세대들은 젊은 세대들이 뭔가 부딪쳐보려는 열정이 없다는 토로를 자주 한다”며 “그러나 정확하게 보면 젊은 세대가 잘못된 게 아니라 (젊은이만 탓하는) 기성세대가 더 문제”라고 지적했다. 세상이 바뀌었으니 리더십도 변화해야 하는데 리더십은 바꾸려 하지 않고 구성원(젊은 세대)만 탓해서는 변화다운 변화를 절대 이끌어낼 수 없다는 게 황 회장의 뿌리 깊은 생각이다.
그는 남의 사례를 모방해 성공하던 시대도 지났다고 단언했다.
특히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사태로 전 세계 어느 국가나 기업도 가보지 못한 길을 가야 하는 시대가 왔기 때문에 과거처럼 ‘어느 나라가 어떻게 했는지’를 먼저 찾아내 따라만 하면 반타작은 할 수 있었던 시대는 다시 오지 않을 것이라는 얘기다. 황 회장은 “남의 것을 따라 하면 안전하다는 심리 때문인데, 모방에 약간의 혁신을 더해 제품을 만들어왔다면 앞으로 그런 성공은 있을 수 없고 글로벌 시장을 리드할 수도 없다”며 “우리는 혁신을 한다고 하면서도 늘 ‘어느 책에 나와 있느냐’ ‘누가 한 적이 있느냐’는 식으로 여전히 모방의식에 갇혀 있다”고 지적했다. 이런 유의 혁신에 대해 그는 “사기”라고 언성을 높였다.
황 회장은 “지식이 경쟁력이 되던 시대 역시 끝났다”며 “학교에서 배운 모든 지식과 경험에 안주하지 말라”고 직언을 쏟아냈다. 그는 “지식과 경험이 과거에는 글로벌 1등이 되는 기반이 됐다면 이제는 평균적으로 갖춰야 하는 능력 정도에 불과하다”며 “혁신을 통해 새로운 시장으로 가려면 그동안의 모방만으로는 어림없다”고 거듭 강조했다.
모방과 혁신의 차이에 대해 황 회장은 “혁신은 눈을 감고 10m를 걷는 것과 같고 모방은 눈을 뜨고 10m를 걷는 것과 같다”고 말했다. 같은 10m를 걷더라도 눈을 감았을 때와 떴을 때의 어려움을 비교하면 천지 차이가 나는데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상황에서 10m를 전진하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혁신에 해당한다는 것이다.
기업의 혁신을 어렵게 하는 이유 가운데 하나로 황 회장은 내부 리더십 부재와 국내 기술에 대한 인수합병(M&A)에 인색한 분위기를 꼽았다. 황 회장은 “기업이 짧은 기간에 혁신하기 위해서는 필요한 기술을 M&A해야 하지만 직원들이 이런 기술이 필요하다고 제안하면 오너나 최고경영자(CEO)는 ‘매년 연구개발(R&D) 비용을 쓰면서 너희들은 무엇을 하고 있었느냐’는 질책을 하기 때문에 아무도 먼저 입을 열지 않는 게 문제”라고 말했다. 이런 분위기는 필요한 기술이 있어도 국내가 아닌 외국에서 M&A를 하게 하는 암묵적인 원인이 되고 있다고 한다. 외국 기업을 M&A하면 당연하게 받아들이고, 국내 기업을 M&A하면 책임 추궁을 피할 수 없기 때문에 국내 M&A가 쉽지 않다는 것이다.
국내 M&A에 대해 이처럼 폐쇄적인 분위기가 강하다 보니 기술을 제대로 평가하는 시장도, 문화도 성숙돼 있지 않다는 게 황 회장의 진단이다. 그는 “국내 기업들은 여전히 기술은 제값을 주고 사는 것보다 베끼거나 탈취하는 게 더 유리하다는 유혹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황 회장은 코로나19가 산업적인 측면에서 보면 혁신을 할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될 수 있다고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혁신이 성공하려면 위기가 필요한 측면이 있어서다.
그는 “경제적으로 풍요하면 기존의 기득권이 자리를 쉽게 놓으려 하지 않기 때문에 혁신이 잘 일어날 수 없다”며 “전쟁과 같은 큰 위기에서 ‘난세의 영웅’이 나듯이 코로나19 사태로 기존의 고정관념을 깨고 혁신이 성공할 수 있는 시대가 찾아왔다”고 말했다.
다만 정부는 “규제를 과감히 없애는” 역할을 충실히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는 “4차 산업혁명 시대에서 벤처·스타트업을 세계적으로 키우려면 이들을 방해하는 걸림돌(규제)을 없애줘야 한다”며 “새로운 것을 만들어내는 혁신을 기존의 정책수단으로 도와줄 수 있다는 발상 자체를 버려야 한다”고 지적했다. 이어 “혁신을 지원한다는 선의의 정책일지라도 기존의 기준으로 판단하게 되면 결국 혁신을 어렵게 하는 것”이라며 정부 정책의 고정관념을 깰 것을 주문했다. 황 회장은 “혁신을 도와줄 수 있는 정책은 나올 수가 없다”며 “(혁신을) 방해하지 않는 것만으로도 (혁신 기업을 키우는 데) 정부가 충분한 역할을 하는 것”이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구산업과 혁신 기업의 갈등으로 대표되는 ‘타다 논란’에 대해서는 “타다는 혁신이 아니라 개선”이라고 말했다. 벤처기업협회장을 지낸 황 회장의 입에서 나온 것치고는 의외였다. 황 회장은 “혁신은 새로운 시장을 만들어야 하는데 타다는 기존 시장의 효율성을 높인 것일 뿐”이라며 “(기업가는) 타다 서비스 도입으로 피해를 볼 수 있는 택시기사 등에 대한 보상 시스템을 먼저 고민해야 했다”고 말했다. 타다의 비즈니스 모델은 황 회장이 강조해온 ‘공유’ 정신이 부족했다는 지적인 셈이다.
정부가 플랫폼 기반의 유니콘(기업가치 1조원 이상의 비상장 회사) 육성에 나서는 데 대해서도 비판적인 생각을 밝혔다. 황 회장은 “시장의 효율을 높여 돈을 버는 유니콘을 육성할 게 아니라 기술 기반의 유니콘 육성에 더 힘써야 한다”며 “유니콘이라고 해서 다 같은 유니콘이 아니듯이 정부도 가려서 지원할 필요가 있다”고 조언했다. /정리=양종곤기자 ggm11@sedaily.com 사진=이호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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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9년 경북 고령 △1986년 인하대 전자공학과 △1986년 한국 ASM 근무 △1993년 주성엔지니어링 창립 △1999년 진공학회 부회장 △2005년~ 일운과학기술재단 이사장 △2007년 한국디스플레이 산업협회 부회장 △2009년 태양광산업협회 부회장 △2010~2012년 벤처기업협회 회장 △2010~2015년 한국청년기업가정신재단 이사장 △2015년~ 한국무역협회 부회장 △2015~2016년 청년희망재단 이사장 △2017~2018년 제어로봇시스템학회 회장 △2018년~ 한국청년기업가정신재단 이사장 △2019년 3월~ 공학한림원 IP전략협의회 공동위원장 △2019년 10월~ 대·중소기업 상생협의회 위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