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2년 6월 5일 10시 25분, 일본은 태평양 전쟁에서 이기고 있었다. 5분 뒤 전황은 완전히 반대로 기울었다. 유사 이래 그 어떤 때에도 이보다 더 빠르게 역사를 완전히 뒤집어버린 사건은 없었다.” 크레이그 시몬스 미 해군대학 교수의 평가다. 그는 2013년 출간한 어떤 책에서 이 사건이 현대사를 극적으로 바꿨다고 썼다. 크레이그 교수의 저서와 사건의 이름은 동일하다. ‘미드웨이 해전(the Battle of Midway)’. 물량에서 미 해군을 압도하던 일본 연합함대가 불과 5분 만에 나락으로 떨어진 해전이다.
흔히 일본은 미국의 공업생산력에 밀려 전쟁에서 졌다고 여긴다. 맞는 말이다. 진주만 공격 4개월 전, 일본군 지휘부가 최종적으로 판단한 미국과의 전쟁 수행 능력 격차는 10대 1. 전함 2대 1, 항공기 5대 1, 노동력 5대 1, 석탄 10대 1, 철강 생산 20대 1, 석유 100대 1로 미국에 뒤졌다. 미국과의 전쟁이 무모하다는 점을 알면서도 일본이 전쟁을 벌인 이유는 ‘희망 사고’ 때문. ‘초전에 미국을 흔들면 겁 많은 양키들이 협상 테이블로 나올 것’이라고 믿었다. 미드웨이 해전은 진주만과 필리핀에서 연패하던 미국이 공세로 돌아선 전환점으로도 손꼽힌다.
미군은 성능이 떨어지는 구식 항공기로 제로센 전투기에 쉽게 사냥당하면서도 집요하게 일본 항공모함에 달라붙었다. 전투 불능상태에 빠진 폭격기를 몰고 일본 항모에 돌진한 사례도 있다. 태평양전쟁 최초의 카미카제는 일본이 아니라 미국이었던 셈이다. 일본이 미드웨이로 전력을 전개한 이유 역시 미국이 보여준 전쟁 의지로 설명될 수 있다. 1942년 4월 19일 미군이 B-25 폭격기를 항모에서 이륙시키는 발상의 전환으로 도쿄를 공습한 게 일본을 미드웨이로 불러들인 요인으로 작용했다.
일본은 본토의 안전을 위해 미군 장거리 폭격기가 발진할 수 있는 섬 점령에 나섰다. 일본은 첫 목표로 정한 미드웨이에 전력을 쏟아 항공모함을 8척이나 동원했으나 전략적 실수를 저질렀다. 미군을 속인다며 부대를 셋으로 나누는 통에 미드웨이 해전에 투입된 항모는 절반인 4척으로 줄었다. 반면 항모가 2척뿐이던 미군은 수리기간 3개월이 필요하다던 항모 요크타운을 3일 만에 전선에 복귀시켰다. 8대 2였던 항모 전력 격차를 4대 3으로 줄인 미군은 일본 함대를 먼저 발견해 불과 5분 만에 3척을 격침했다. 하루 뒤 남은 한 척 마저 상실한 일본은 공격할 힘을 잃었다. 근거 없는 희망에서 나온 자만과 판단 착오가 부른 참패다.
/권홍우선임기자 hongw@sedaily.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