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이 탈북자 단체의 대북전단 살포를 빌미로 9일부터 아예 모든 남북 연락선을 차단한다고 으름장을 놓았다. 더욱이 김여정 북한 노동당 제1부부장이 남한을 적(敵)으로 규정하겠다고 나서며 또 다른 보복조치까지 예고했다. 청와대와 정부는 당혹스러운 분위기 속에 원론적 입장만 되풀이하면서 말을 아꼈다. 전문가들은 앞으로 북한이 개성공단 자산 몰수와 완전 철거, 핵실험을 비롯한 무력도발 등을 단계적으로 밟을 가능성을 점쳤다.
조선중앙통신은 9일 ‘북남 사이의 모든 통신연락선들을 완전 차단해버리는 조치를 취함에 대하여’라는 제목의 보도를 통해 “정오부터 북남공동연락사무소를 통해 유지해오던 북남 당국 사이의 통신연락선, 북남 군부 사이의 동서해통신연락선, 북남통신시험연락선, 노동당 중앙위원회 본부청사와 청와대 사이의 직통 통신연락선을 완전 차단·폐기한다”고 알렸다. 통신은 김여정과 김영철 당 중앙위 부위원장이 전날 대남사업 부서 사업총화회의에서 이 같은 지시를 내렸다고 부연했다.
통신은 또 김여정과 김영철이 “대남사업을 철저히 대적사업으로 전환해야 한다는 점을 강조하면서 배신자들과 쓰레기들이 저지른 죗값을 정확히 계산하기 위한 단계별 대적사업 계획들을 심의했다”며 “남조선 것들과의 일체 접촉공간을 완전 격폐하고 불필요한 것들을 없애버리기로 결심한 첫 단계 행동”이라고 밝혔다. 남측에 대한 추가적인 보복조치가 있을 것을 암시한 것이다.
실제로 북한은 이날 오전9시와 정오께 남북공동연락사무소를 통한 통일부의 전화를 받지 않았다. 동·서해지구 군 통신선과 양측 함정 간 국제상선공통망을 통한 국방부의 전화 시도에도 오전·오후 모두 응답하지 않았다. 남북공동연락사무소와 군 통신선을 통한 연락이 완전히 중단된 것은 지난 2018년 6~8월 각각의 연락선들이 도입·복구된 지 2년여 만에 처음이다.
북한은 전날에도 오전9시 남북공동연락사무소의 연락을 받지 않다가 오후5시 정상 통화를 진행하는 등 오락가락하는 모습을 보였다. 북한은 다만 차단할 연락선으로 국가정보원과 북한 노동당 통일전선부 사이의 핫라인은 언급하지 않아 이를 ‘최후의 보루’로 남긴 것으로 분석됐다. 이 핫라인은 김대중 정부의 2000년 남북정상회담 이후 연결됐다가 이명박 정부 시절 단절됐고 2018년 김여정의 평창동계올림픽 파견을 계기로 복원됐다.
청와대는 북한의 이 같은 조치에 공식 입장은 내놓지 않은 채 국가안보실을 중심으로 의도 분석과 대응책 마련에 집중했다. 국가안전보장회의(NSC) 상임위원회는 일단 소집하지 않았지만 남북 정상 간 핫라인 가동 여부는 밝히지 않았다. 통일부는 “남북 통신선은 소통을 위한 기본수단이므로 남북 간 합의에 따라 유지돼야 한다”는 원론적 입장만 밝혔다.
청와대 내부의 기류를 잘 아는 윤건영 더불어민주당 의원은 “남북 정상 간 합의 사항이 제대로 지켜지지 않는 것에 대해 불만이 누적된 것 같다”고 진단했다.
전문가들은 북한이 지난해 2월 하노이 북미정상회담 결렬 이후 쌓였던 불만을 대북전단을 빌미로 쏟아내고 있는 것으로 분석했다. 문재인 대통령이 장담했던 북미관계 회복 구상이 어그러진데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사태로 극심한 경제난까지 겹치면서 또다시 ‘벼랑 끝 전술’을 들고 나왔다는 평가다.
전문가들은 북한이 연락선 차단을 시작으로 개성공단 완전 철수, 9·19남북군사합의 파기의 수순을 밟으며 우리 정부를 압박할 것으로 예상했다. 정대진 아주대 통일연구소 교수는 “이번 조치는 4일 김여정 담화의 세 가지 조치인 연락사무소 폐지, 개성공단 완전 철수, 군사합의 파기 중 1단계를 실행에 옮긴 것”이라며 “다음 조치인 개성공단 완전 철수를 위한 자산 몰수도 임박한 것으로 보인다”고 분석했다. 임을출 경남대 극동문제연구소 교수는 “대남사업을 대적사업으로 전환한다는 결정은 최악의 경우 군사적 대결상황까지 고려한 결정으로 해석된다”고 진단했다.
대통령 직속 자문기구인 민주평화통일자문회의의 정세현 수석부의장은 이날 한 라디오 프로그램에 출연해 “전단 살포를 강행할 때는 경찰병력이나 군병력을 동원해서라도 막아야 한다”며 “김여정이 북한 ‘넘버2’가 됐는데 (대북전단 살포로) 김정은이 모독을 당한 데 대해 반발을 세게 해야만 충성심이 확인되는 상황”이라고 해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