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교부가 이른바 ‘2015년 윤미향 면담’ 기록을 미루고 미룬 끝에 공개하지 않기로 결정하면서 다시 한 번 논란이 일고 있다. 해당 면담 기록은 윤미향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박근혜 정부 당시 한일 위안부 합의 내용을 미리 알고 있었는지 여부를 밝힐 ‘스모킹건’으로 지목된다.
더불어 “국익을 현저히 해칠 우려가 있다”는 비공개 사유 역시 논란거리다. 일개 시민단체 대표가 국가, 그것도 보수 정권이었던 박근혜 정부와, 알려지면 국익을 해칠 수 있을 만큼의 심도 있는 중대사를 논했다는 뜻으로 해석되기 때문이다. 면담 내용에 한일 외교당국 간 기밀이 포함되지 않았다면 국익을 치명적으로 해칠 여지가 줄어 비공개 근거가 약해진다. 반면 기밀이 포함됐다면 외교부와 윤 의원이 주요 내용을 사전에 공유했을 가능성이 높아진다. <관련기사> ▶[단독] 외교부, 윤미향 국회의원 취임 전날 '위안부합의 면담' 공개 결정 연기
외교부, ‘2015년 윤미향 면담’ 공개 결국 거부
보수 성향의 변호사 단체인 ‘한반도 인권과 통일을 위한 변호사모임(한변)’에 따르면 외교부는 지난 11일 ‘2015년 윤미향 면담’ 기록을 공개하지 않기로 결정했다고 이 단체에 통보했다. 외교부는 이에 대해 “공공기관의 정보공개에 관한 법률(정보공개법) 제9조 제1항 제2호 관련 사항으로 비공개한다”고만 설명했다. 해당 조항은 ‘국가안전보장·국방·통일·외교관계 등에 관한 사항으로서 공개될 경우 국가의 중대한 이익을 현저히 해칠 우려가 있다고 인정되는 정보’를 비공개 대상으로 규정한다. 이날 김인철 외교부 대변인 역시 정례브리핑에서 “조항에 규정된 대로 결정했다”는 답만 되풀이했다.
한변은 이에 관해 즉각 행정소송에 나서겠다고 주장했다. 김태훈 한변 회장은 “외교부가 ‘2015년 윤미향 면담’ 관련 정보를 비공개로 결정한 것은 국민의 헌법상의 알 권리를 중대하게 침해하고 의혹을 증폭시키는 위법·부당한 처분”이라며 “정보공개법 제20조에 따라 행정소송을 제기해 비공개 결정의 취소를 구할 것”이라고 경고했다.
외교부가 답변 미룬 다음날 윤미향은 국회의원 취임
애초 이 문건에 대한 외교부의 정보공개 결정 시한은 이달이 아닌 지난달 29일이었다. 한변이 정보공개를 청구한 시점이 지난달 15일이었던 만큼 외교부는 이로부터 10일 이내(휴일 제외)에 한변에 답을 줬어야 했다. ‘공공기관의 정보공개에 관한 법률’ 제11조는 ‘정부기관이 정보공개 청구를 받은 날부터 10일 이내에 공개 여부를 결정해야 한다’고 규정한다.
외교부는 여기서 ‘부득이한 사유로 기간 내에 결정할 수 없을 때는 그 기간을 열흘 더 연장할 수 있게 한다’는 예외 조항을 십분 활용했다. 외교부가 당시 기간 연장을 위해 한변 측에 통보한 ‘부득이한 사유’는 “내부 검토 및 처리에 시간이 걸려서”였다. 공교롭게도 윤 의원은 바로 다음날인 5월30일 공식적으로 국회의원이 됐다.
이번 논란은 지난달 초 위안부 피해자인 이용수 할머니가 “2015년 한일 합의 당시 10억엔이 일본에서 들어오는 것을 윤미향 당시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 대표만 알고 있었다”고 주장한 데서 비롯됐다. 윤 의원은 이에 대해 “전날 연락은 받았지만 (돈의 액수 등) 핵심 내용은 빠진 채 들었다”고 반박했고 외교부도 윤 의원의 주장에 힘을 실었다. 의혹이 제기된 지 3주나 지난 시점에도 외교부는 ‘이례적으로’ 내부 검토를 마무리하지 못했던 것이다.
아무도 모르는 ‘현저히 해칠 수 있는 국익’
외교부가 최종적으로 비공개 사유로 든 ‘국가의 중대한 이익’은 국가안전보장·국방·통일보다는 ‘외교관계’와 관련됐을 가능성이 크다는 진단이다. 특히 그 가운데서도 한일관계를 신경 썼을 것이란 게 외교가 안팎의 대체적인 추론이다. 외교부는 기존에도 윤 의원 면담 내용이 공개될 경우 가뜩이나 좋지 않은 한일관계에 부정적인 영향이 발생할 가능성을 줄곧 우려한 것으로 알려졌다.
윤 의원 면담 기록이 어떤 방식으로 국가의 중대한 이익과 연계되는지는 전혀 알려지지 않았다. 일각에서는 면담 내용에 한일 양국이 제기한 구체적 주장과 대응 내용, 양국의 입장 차이 등 외교적 비밀에 관한 사항이 담겼을 수 있다고 지적했다.
실제로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민변) 소속 송기호 변호사는 외교부를 상대로 ‘2015년 한일 위안부합의’ 교섭 문서 자체에 대한 정보 비공개처분 취소소송을 냈는데 지난해 4월 2심 재판부는 앞선 이유로 송 변호사의 패소를 선고했다. 서울고등법원 행정3부는 당시 “외교관계에 관한 사항은 특히 전문적 판단을 요하고 외교부 결정을 최대한 존중할 필요가 있다”며 “이 사건 정보가 공개된다면 일본 측의 입장에 관한 내용이 일본 측의 동의 없이 외부에 노출됨으로써 지금까지 우리나라와 일본 사이에 쌓아온 외교적 신뢰관계에 심각한 타격을 받을 뿐만 아니라 양국 간 이해관계의 충돌이나 외교관계의 긴장이 초래될 수 있다”고 지적했다.
외교기밀 포함됐어도 문제, 아니어도 문제
문제는 국가 대 국가 간 교섭자료를 요구한 송 변호사 사건과 달리 윤 의원 면담은 외교부와 시민단체인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 대표자 사이의 대화 기록일뿐이란 점이다. 만약 면담 기록에 한일 간 기밀 사항이 포함됐다면 윤 의원은 10억엔이란 구체적 합의 액수는 아니더라도 전체적인 합의 방향이나 일본 측의 입장 정도는 사전에 알았을 수 있다는 얘기가 된다.
일부 전문가들의 주장대로 당시 한일 협상에 대한 시민사회의 반응과 평가 자체를 비밀로 해석했을 수도 있다. 다만 위안부 합의 발표 이후 각종 시민단체들과 여론의 거센 반대는 이미 알려질 대로 알려진 상태다.
이 때문에 한변은 지난달 15일 외교부에 윤 의원 면담 기록에 관한 정보공개를 청구하면서 “국가 간 협의도 아닌 시민단체와의 면담 내용을 공개하지 못할 이유가 없다”고 주장했다. 이에 대해 외교부는 지난달부터 줄기차게 “(위안부 합의 당시 일본 정부가 국고에서 내기로 한) 10억엔이라는 돈 액수를 윤 의원과 정의연에 구체적으로 미리 알리지도 않았고 동의받지도 않았다”는 내용이 담긴 2017년 ‘위안부 합의 검토 태스크포스(TF)’ 결과 보고서를 참조하라는 입장만 고수했다.
윤 의원이 현재 시민단체 대표가 아닌 하나의 헌법기관으로서 국회의원 신분이 된 점을 고려했을 것이라는 분석도 나온다. 그가 정대협 대표로서 일본에 대해 강성 발언을 했거나 다소 무리한 요구를 내놓았다면 윤 의원이 입법권을 쥔 현 상황에서 그 자체가 공개하기 껄끄러운 사유가 됐을 수 있다는 것이다. 실제로 윤 의원은 더불어시민당 비례대표 후보자 시절부터 일본 당국의 집중적인 관심을 받았다.
비공개를 전제로 한 면담 내용이 공개될 경우 앞으로 다른 시민단체와의 협의에 어려움을 겪을 수 있다는 점도 사유 중 하나로 추정됐다. 그러나 이는 ‘국가안전보장·국방·통일·외교관계 등 국가의 중대한 이익’과는 거리가 먼 사유다.
※‘국정농담(國政濃談)’은 행정·외교안보·정치 관련 ‘농도 짙은’ 현장 이야기와 현안 소식을 전달하는 코너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