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우리 탈북민 단체가 북한으로 전단을 날려 보내자 북한 지도부가 개성의 남북공동연락사무소를 폭파하고 연일 거친 언사를 쏟아내고 있다. 이로 인해 남북관계에 평화 무드가 깨지고 다시 긴장 국면으로 돌아가지 않을까 하는 우려가 제기되고 있다. 북한의 거친 언사를 둘러싸고 다양한 해석이 나오고 있다. 아직 상황이 유동적이라 뭐라고 단정할 수는 없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남북 사이에 의사소통이 원활하지 않다는 점이다. 서로가 서로를 향해 이해할 수 없다는 반응을 보이고 있기 때문이다.
사람의 관계는 원래 예측하기가 어렵다. 이 때문에 우리는 약속이나 계약 등 문건을 작성해서 그 범위 안에서 움직이기로 해 예측 밖으로 튀어 나갈 가능성을 예방하려고 한다. 약속과 계약의 조항이 모든 것을 담을 수 없고 또 서로의 의사를 완벽하게 구현할 수 없다. 실컷 약속해놓고 쌍방이 해석을 달리해 다시 갈등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춘추전국 시대의 제자백가도 사람 사이를 예측 가능한 방식으로 규정하고자 했다. 대부분 이런 총론에 동의했지만 구체적으로 어떻게 할 것인가를 두고는 방법이 달랐다. 상앙은 국부를 늘려서 부국강병의 목표를 이루고자 했기 때문에 정부와 백성 사이에 예측 가능한 관계가 이뤄져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를 위해 그는 반드시 그렇게 되는 이치의 필연지리(必然之理)와 반드시 안정되는 필치지정(必治之政)을 꿈꿨다.
이 때문에 그는 유가의 인의 정치가 부족하다고 봤다. 내가 상대에게 호의로 대하더라도 상대가 꼭 나에게 호의로 대하지 않을 수 있고 내가 상대에게 합리적으로 대하더라도 상대가 나에게 합리적으로 대하지 않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는 사람 사이의 우연성을 통제하기 위해 예측 가능한 관계의 방식을 법으로 규정하고 그것을 어기면 엄하게 처벌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렇게 돼서 사람이 규정의 내용을 알고 처벌의 엄중성을 인지한다면 서로 약속된 방식으로 소통이 이뤄진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맹자는 법으로 규정되는 관계보다 인의로 맺어지는 관계가 더 타당하다고 봤다. 하지만 그도 고민이 없을 수 없었다. 보통 사람이 상대에게 호의와 예의로 대하면 상대는 호의와 예의로 대하기 마련이다. 하지만 상앙이 이미 지적했듯이 내가 아무리 호의와 예의를 다해 상대를 대하더라도 상대는 거꾸로 막무가내로 밀어붙이고 거칠게 대응할 수 있기 때문이다(대아이횡역·待我以橫逆).
맹자는 예상하지 못한 상대의 거친 대응에 대해 처음에는 ‘이 사람이 도대체 왜 이러지(차물해의지재·此物奚宜至哉)’ 하며 의아심을 가질 수 있다고 봤다. 하지만 곧바로 상대를 탓할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을 돌아보자고 제안했다. 즉 내가 무슨 잘못을 했거나 나의 대응에 정성이 부족한 것이 없는지 돌아보자는 것이다. 이어 다시 이전처럼 호의와 예의를 다해 상대를 대하지만 여전히 거친 방식으로 반응이 되돌아온다. 다시금 자신을 돌아보며 무슨 문제가 있을까 생각해본다. 그래도 상대의 변화가 없으면 ‘이러면 막가는 사람일 뿐이야. 이와 같은 동물과 어떻게 구별할 수 있을까(차역망인야이의·此亦妄人也已矣. 여차즉여금수해택재·如此則與禽獸奚擇哉)’라고 평가했다.
두 이야기를 듣고 보면 상앙의 해결책이 효율적이라고 생각하기 쉽다. 하지만 세상에는 법으로 강제할 수 있는 사이도 있고 그렇지 않은 경우도 있다. 전자야 상앙의 방식으로 한다고 하더라도 후자는 맹자의 방식이 통할 수밖에 없다. 후자의 경우에 ‘차물’과 ‘망인’ 그리고 “동물과 뭐가 다른가”라는 말은 하기가 쉽다. 하지만 그렇게 한다고 해도 문제가 해결되지 않고 더 꼬이게 된다면 상대의 거친 말에도 그대로 맞대응해 상황을 더 악화시키는 방식은 피해야 한다.
같은 상황에서도 사람이 받아들이는 방식과 해석하는 틀이 다르다. 이를 인정하고 상대의 거친 말속에 숨겨진 의미를 들어보지 않을 수 없다. 이때 기다리는 시간은 답답하고 숨 막히게 느껴지더라도 결국 언어로 문제를 해결할 수밖에 없는 만큼 자극적이기보다 합당한 말을 쓰지 않을 수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