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에서 만나자”
종로구 부암동 환기미술관 바로 옆에 위치한 에이라운지 전시장에 들어서니 작가 권남희의 네온 설치작품 ‘역에서 만나자’가 먼저 말을 건다. 누군가에게 맘 편히 만나자고 청한 게 언제였던가, 그것도 사람 붐비는 역에서 보기로 약속한 것은 또 언제였던가. 코로나19(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 확산 여파로 사회적 거리두기와 생활 속 거리두기가 일상이 된 요즘인지라 작품 앞에서 만감이 교차한다.
“이 또한 지나가리라”
적막을 가로지르는 초침의 움직임과 함께 심아빈의 조각 ‘시계 방향으로’에 시선이 이끌린다. 둥근 시계 모양의 이 작품은 숫자가 있어야 할 자리에 이,또,한,지,나,가,리,라의 글자가 놓여있다. 힘든 이 시기도 언젠가는 끝날 것이라는 희망의 문구다. 그 옆 벽에 일렬로 걸린 왕선정의 ‘그 남자 연작’은 등 돌린 ‘나’ 혹은 ‘당신’의 모습일지도 모른다는 상상을 들게 한다.
지난 5월 28일 개막해 6월 20일까지 열리는 기획전 ‘꿈의 대화’다. 전시를 기획한 독립 큐레이터 류동현 씨는 “14세기 중반 유럽에 퍼진 페스트로 많은 사람들이 쓰러져 나갔지만 독특하게도 이후 그림 수가 급격히 증가했는데, 미술기법과 재료의 발전도 영향을 끼쳤지만 역병으로 세상을 떠난 수많은 사람들을 그림을 통해 추모하고 내세의 안녕을 빌었기 때문”이라며 “그로부터 600년이 지나 코로나19라는 미지의 역병이 퍼진 상황에서 이범용·한명훈이 1980년 대학가요제에서 선보인 노래 ‘꿈의 대화’에서 제목을 따온 전시를 통해 우리에게 꿈은 어떤 의미인지 묻는 동시에 미술을 통해 위안과 희망을 꿈꾸길 바랐다”고 말했다.
임현정의 그림 속 풍경은 기괴한 군상을 담은 그림으로 유명한 네덜란드 화가 히에로니무스 보쉬의 작품을 떠올리게 한다. 대신 그 내용은 남산과 불상 등이 등장하는 ‘우리네 모습’들이다. 미술사적 배경지식이 풍부한 작가는 기존의 명화를 패러디 하는 수준을 택하지 않고 자신만의 방식, 이 시대의 소재를 택해 독특하게 재해석한다.
따뜻하면서도 몽환적인 색채의 추상 이미지로 2차원과 3차원을 가로지르려 시도하는 최은혜의 그림들은 이상향의 세계를 떠올리게 한다.
정해진 틀 안에서 규칙적으로 움직이는 시계추이건만 휘젓는 손은 아무것도 붙들지 못하는 심아빈의 영상 ‘너와 나’ 등 시계를 모티브로 한 작품들은 코로나 시대를 관통하는 중인 ‘지금’의 의미를 되새기게 한다. 세밀하게 시계 장치가 그려진 캔버스의 뒷면에서는 실제로 시계바늘이 움직이고 있는데, 심 작가는 여기에 ‘내가 하는 것’이라는 제목을 붙여 실용적인 역할과 전혀 무관하지만 극도로 공들여 작업하는 예술의 의미를 되새기게 했다.
전시장을 떠나기 위해 현관 앞에 섰을 때 비로소 문 옆에 설치된 권남희의 작품이 보인다. 손수건에 희미하게 새긴 ‘When you cry…I will cry…(당신이 눈물을 흘리면 나도 같이 울어줄게요)’는 전시 전체의 메시지인 동시에 미술이 당신에게 나지막이 건네는 대화다.
/글·사진=조상인기자 ccsi@sedaily.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