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의 혈세를 어떻게 편성하고 쓰는지를 감시하는 국회 예산정책처가 23일 역대 최대 규모인 35조3,000억원의 3차 추가경정예산안 일부에 “사업설계를 보완하고 국회 심의과정에서 충분히 소명하라”는 부정적 평가를 내놓았다.
예정처는 이날 ‘2020년도 제3회 추가경정예산안 분석’ 보고서를 통해 “이번 추경은 막대한 국채를 발행해 재원을 충당하는 만큼 어느 때보다 엄밀하게 심사할 필요가 있다”고 결론을 내리고 “국회 심의과정에서 충분한 논의와 보완이 이뤄져야 한다”고 지적했다.
예정처는 특히 문재인 대통령이 강력하게 드라이브를 걸고 있는 디지털 뉴딜(2조7,000억원)과 그린뉴딜(1조4,000억원), 고용안전망(1조원) 등과 관련해 “사업 취지를 못 살렸다” “효과를 담보하기 어렵다” “심의과정을 충분히 해야 한다” 등의 의견을 내놓았다. 더 나아가 예정처는 고용사업이 실제 실업자 수에 비해 부풀려졌다고 평가했다. 또한 대통령이 강조한 한국판 뉴딜사업 가운데 예비타당성조사가 면제된 9개 사업은 “사업 적정성을 다시 검토해야 한다”고 했다.
이번 추경은 지난 3월(11조7,000억원)과 4월(14조3,000억원)에 이은 세 번째로, 역대 최대인 23조8,000억원의 빚을 내 35조3,000억원을 △고용안정 △한국판 뉴딜 △기간산업·금융지원 등에 사용하는 내용이다.
하지만 청와대와 정부는 추경안을 심사할 국회 상임위원회가 구성되기도 전에 “서둘러 통과시키라”고 밀어붙이고 있다. 최근 ‘비상한 방법’을 주문했던 문 대통령은 이날 국무회의에서도 추경 통과를 강조했고 더불어민주당은 다음달 3일 국회 통과를 선언했다.
그러나 176석의 거대 여당인 민주당이 예정처가 일부 부실 판정을 내린 3차 추경안을 단독으로 심사해 넘길 경우 비판을 피하기 어려울 것으로 전망된다. 미래통합당의 예산 전문가인 송언석 의원은 “전무후무한 빚을 낸 추경안에 코로나 관련 예산은 3조원 내외 수준”이라고 지적했으며 윤창현 의원도 “올해만 세 차례, 부풀려진 사업계획으로 돈 쓰기에 나선 정부에 예정처가 경종을 울린 것”이라고 비판했다.
'후버식 디지털 댐' 한국판 뉴딜 사업도 의문 |
그러나 문 대통령이 이처럼 다급하다고 강조하는 3차 추경의 효과에 대해 국회 예산정책처는 강한 의문을 제기했다. 문 대통령이 지난 1930년대 미국 대공황 시대 뉴딜정책의 상징인 후버댐에 견줘 ‘후버 식 디지털 댐’으로 칭한 한국판 뉴딜 사업에 커다란 물음표가 던져진 셈이다.
이날 예정처는 4일 홍남기 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이 “속이 타 들어간다”며 낸 3차 추경안에 대해 “사업 효과를 극대화할 수 있도록 편성됐는지 국회 심의를 통해 면밀히 검토돼야 한다”며 제동을 걸었다. 법대로 “국회 심의부터 받으라”는 것이다. 특히 23조8,000억원이라는 역대 가장 큰 빚을 낸 추경안을 두고 “세계에서 가장 빠른 저성장·고령화가 시작돼 막대한 복지지출이 예정돼 있고 국제무역을 통해 부를 창출할 구조적 현실을 고려하라”는 충고도 덧붙였다.
예정처는 특히 역대 최대 규모(35조3,000억원)의 추경으로 추진할 △고용안정특별대책(9조4,000억원) △한국판 뉴딜 사업(5조1,000억원) △금융안정 패키지 후속 조치(5조원) 등의 세부 사업이 부실하다고 진단했다.
이번 추경안에 따르면 고용대책은 약 155만명 이상을 대상으로 사업을 진행한다. 예정처는 이에 대해 “5월 기준 전체 실업자 수 127만8,000명을 초과하는 규모이고 경기가 좋을 때도 실업자 수가 100만명 정도를 유지했다는 점에서 볼 때 과도한 측면이 있다”며 “상당수는 일회성 단기 공공부조 성격에 그치게 될 우려가 있어 국회 심의 과정에서 사업설계를 보완할 필요성이 크다”고 판단했다.
이와 함께 추경이 통과된 후 쏟아질 직접 일자리만 55만개로 평가하며 “노동시장의 초과 공급이 우려된다”고 평했다. 또 “직접 일자리 사업의 일부는 다른 재정 사업과 유사하거나 중복될 우려가 있다”고 했고 “보조·위탁·출연 등 민간기관을 통한 직접 일자리 사업은 채용·보수지급 등 사업 전반의 부정행위에 대한 필요성이 더욱 커질 것”이라고 꼬집었다.
무엇보다 예정처는 특히 문 대통령이 ‘후버 식 디지털 댐’으로 칭한 한국판 뉴딜 사업의 상당수에 대해 “부실하거나 효과가 불확실하다”며 “신산업·신기술을 육성하기보다 이미 범용화된 기술을 단순 활용하는 수준”이라고 진단했다.
그러면서 국가재정법에 따라 예비타당성 조사가 면제된 9개 사업(약 9,343억원)에 대해 “예비타당성 조사 운용지침 제23조에 따라 사업 규모와 수단 등 타당성을 검토하는 사업계획의 적정성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고 지적했다. 예타가 면제된 사업이 적절한지 재검토하라는 말이다.
이와 함께 △그린뉴딜 유망기업 육성 △스마트 그린도시 △산업단지 태양광발전 사업자 사업 △스마트 사업간접자본(SOC) 사업 △호흡기 전담 클리닉 설치·운영지원 사업 등은 ‘사업계획이 부실한 사업’으로 분류했다. 또 ‘사업효과가 불확실한 사업’에 △인공지능(AI) 바우처 지원 △빅데이터 플랫폼 및 네트워크 구축 △전국 여행업체 실태 전수조사(1개월 운영) 등을 분류하고 “철저한 사업계획을 마련할 필요가 있다”고 설명했다.
정부가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으로 타격을 받은 산업계에 유동성을 공급하는 ‘금융안정 패키지 후속조치’도 면밀히 설계하고 검토하라는 지적이 나왔다. 예정처는 “위기산업과 기업에 충분한 유동성이 공급될 수 있도록 세부계획이 설계됐는지를 중점적으로 검토할 필요가 있다”며 “경영정상화 가능성이 없는 한계기업까지 자금을 지원하는 것은 국가재정의 효율성과 건전성을 저해하는 결과로 이어질 수 있다”고 지적했다.
여당인 더불어민주당은 3차 추경을 속전속결로 처리할 태세지만 미래통합당은 당정청이 부실한 추경안을 밀어붙여 통과할 경우 책임을 면치 못할 것이라고 반발했다. 윤창현 통합당 의원은 “정부가 올 들어서만 3월·4월·6월 세 차례 추경안을 내며 사업이 중복되거나 효과가 부풀려진 사업이 많다”며 “여당이 이마저도 ‘일하는 국회’를 내세워 졸속으로 넘기려 하자 예정처가 세금을 그렇게 쓰면 안 된다고 제동을 건 것”이라고 말했다. 류성걸 의원도 “추경이 그렇게 급하다면 졸속 처리할 게 아니라 야당과 상임위원회를 구성해 법대로 심사를 받는 것이 우선”이라고 지적했다.
바닥난 고용기금까지 끌어다 써…결국 국민이 부담 |
국회예산정책처가 발간한 2020년도 3차 추경안 분석 보고서에 따르면 당초 올해 1조4,014억원으로 계획됐던 고용보험기금 재정수지 적자 규모는 3차 추경안이 반영되면 적자 규모가 2조2,866억원 더 확대될 것으로 예상된다. 고용보험기금 재정수지는 지난 2016년부터 악화하기 시작해 문재인 정부 집권 2년차인 2018년 적자 전환했고 이후 지속적으로 적자폭이 커지는 양상이다. 이는 급격히 오른 최저임금과 사실상 그와 연동돼 상향 조정된 구직급여액, 고용보험 가입자 증가, 코로나19 사태로 인한 실직자 증가 등이 영향을 미친 결과로 풀이된다. 지난달 실업률은 5월 기준 역대 최악(4.5%)을 기록했고 한 달 구직급여 지급액이 사상 처음으로 1조원을 돌파했다.
가뜩이나 고용보험기금 재정수지가 악화 일로를 걷고 있는 상황에서 더 큰 문제는 고용보험기금이 추경안의 재원으로 계속해서 활용되고 있다는 점이다. 보고서에 따르면 고용보험기금 미래의 급여(보험금) 지급을 위한 예비 재원인 여유자금은 2017년 2,202억원, 2018년 3,126억원 2019년 1조2,923억원, 2020년 1차 2,874억원, 3차 1조1,878억원이 각각 추경안 재원으로 활용됐다. 그 결과 고용보험기금의 여유자금잔액(누적적립금)은 2017년 말 10조3,000억원에서 2020년 말 3조7,000억원으로 3년 만에 64%가 감소할 것으로 보고서는 전망했다.
예정처 관계자는 “기금의 재정건전성이 저하되면 구직급여 지급 등의 기본적인 역할 수행도 힘들어질 수밖에 없다”며 “정부는 고용보험기금의 재정건전성을 확보하기 위한 방안 모색을 병행해야 한다”고 말했다. 정부의 한 관계자는 “고용보험기금이 쓰이는 사업의 종류가 적지 않아 고갈 우려가 큰데 정부가 고용보험기금을 쌈짓돈처럼 쓰고 있다는 비판을 지속적으로 받고 있는 게 사실”이라며 “기금이 바닥나면 결국 부담은 국민의 몫이 될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임지훈·구경우·허세민기자 jhlim@sedaily.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