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 국회·정당·정책

토씨만 바꿔 재탕 발의...졸속 막으려면 입법영향 평가해야

[과잉 규제법안 쏟아내는 국회-역대 최다 법안 913건 뜯어보니]

박용진 의원, 20대 국회 미처리 법안 51개 그대로 제출

지역·소속 직능단체 이익 법안들 충분한 검토 없이 내놔

보좌진들이 의원실 옮기며 기존 아이템 다시 쓰는 사례도

21대 국회 첫 상임위원장 선출을 위해 15일 열린 국회 본회의에서 미래통합당 의원들의 불참속 통합당 주호영 원내대표가 의사진행발언을 하고 있다./사진=연합뉴스21대 국회 첫 상임위원장 선출을 위해 15일 열린 국회 본회의에서 미래통합당 의원들의 불참속 통합당 주호영 원내대표가 의사진행발언을 하고 있다./사진=연합뉴스



# 지난 23일 한국편의점주협의회와 한국중소상인자영업자총연합회 관계자가 이수진 더불어민주당 의원실을 찾았다. 이 의원이 발의한 ‘근로자퇴직급여보장법 개정안’ 발의를 철회해달라는 이유에서였다. 이 의원은 21대 국회 개원과 동시에 1개월 이상 1년 미만 근속자에게 의무적으로 퇴직금을 지급하도록 하는 법안을 발의해 논란이 됐다. 자영업자들 사이에서 현실과 동떨어진 무리한 법안이라는 항의가 쏟아지기 시작했고, 한 편의점 점주는 청와대에 법안 철회를 요청하는 국민청원을 올리기도 했다.

# 박주민 민주당 의원이 발의한 이른바 ‘전월세무한연장법(주택임대차보호법)’이 또 한번 논란이 됐다. 임대인의 재산권을 제한한다는 내용도 내용이지만, ‘통계 조작’ 의혹이 불거진 탓이다. 박 의원이 제출한 법안 제안 이유에는 2014년까지 ‘우리나라 전체 가구 중 주택의 자가점유율이 꾸준히 낮아진다’는 통계만 제시돼 있는데, 실제 2015년 이후로는 상승과 하락을 거쳐 자가점유율이 높아졌다. 박 의원은 “제안 이유와 문구를 꼼꼼하게 살피지 못했다”고 해명했지만 “20대 국회 법안을 그대로 복사·붙여넣기했다”는 비판은 피할 수 없었다.






21대 국회 법안 발의 건수가 같은 기간 역대 최대치를 큰 격차로 경신하는 이유는 20대 국회 미처리 법안을 그대로 제출하거나 지역·소속 직능단체의 이익에 부합하는 법안을 충분한 검토 없이 제출해서인 것으로 분석된다. 반헌법적이거나 현실 상황에 맞지 않는 법안들이 쏟아지는 사태를 막기 위해 ‘입법영향 사전평가’를 철저히 해야 한다고 전문가들은 지적한다.

이수진 의원은 발의 뒤에야 문제점을 발견하고도 “법안 철회는 어렵다”는 입장을 유지하고 있다. 다만 이 의원 측은 “근속기간 조건을 3개월로 올리고 1년의 유예기간을 두는 게 어떠냐”고 했다. 단기 아르바이트생에게 퇴직급여를 제공하도록 의무화할 경우 그 부담이 편의점·치킨집 등 소규모 자영업자에게 전가되는 것을 인정한 셈이다. 한국노총 부위원장 출신인 이 의원은 총선 전 민주당과 한국노총의 간담회를 통해 해당 법안의 처리를 약속했고 개원 5일 만에 법안을 발의했다. 소상공인의 입장을 듣기 위한 공청회는 따로 열지 않았다. 이 의원 측은 “앞으로 소상공인들과의 대화를 통해 입장을 정리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박주민 의원이 ‘법안 붙여넣기’로 논란을 빚기 이틀 전인 16일 같은 당 박용진 의원은 20대 국회 미처리 법안 51개를 그대로 다시 국회 의안과에 제출했다. 그는 “세상을 변화시키겠다는 의지, 국민의 삶을 편하게 하겠다는 법안들의 취지를 21대 국회에서도 책임 있게 이어가도록 노력하겠다”는 취지라고 설명했다. 다만 법안 제안 이유들도 지난 국회에서의 발의 내용과 다르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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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대 국회에 20대 국회의 2배, 18대 국회의 12배에 달하는 924건의 법안이 쏟아지는 배경에는 ‘법안 재활용’이 있다. 재선을 하며 이전에 발의했던 법안을 재차 내는 박용진 의원의 사례가 대표적이다. 천안병의 이정문 의원은 지역구 전임들로부터 법안을 승계하기도 했다. 20대 국회에서 활동한 양승조 충남도지사와 윤일규 전 의원이 발의한 법안 17개를 살짝만 뜯어고친 채 법안을 다시 제출했다.

보좌진들이 의원실을 옮기면서 기존 아이템을 다시 쓰는 경우도 있다. 개원 초기 의원들에게 능력을 인정받아야 하는 보좌진들이 ‘도장 찍기’에 나서는 경우다. 미래통합당의 한 보좌진은 “특히 초선 의원들은 의욕이 넘친다. 만약 다선 의원의 방에 계속 있다면 무리하게 내지 않을 법안들이라도 의원이 법안을 내자고 하면 내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지역주민들의 환심을 사기 위해 의원이 무리한 법안을 내놓는 경우도 있다. 양향자 민주당 의원이 발의한 ‘역사왜곡금지법’이 그러한 사례다. 해당 법안은 5·18광주민주화운동, 세월호 참사, 일제강점기 역사 폭력에 대한 사실을 왜곡·부정하는 경우 최대 7년의 징역에 처하는 내용을 골자로 한다. ‘광주의 딸’을 자임하는 양 의원이 5·18특별법을 낸 셈이다. 그러나 이 법을 두고 ‘표현의 자유 침해’ 논란이 불거졌다. 김태규 부산지법 부장판사는 22일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를 통해 역사왜곡금지법을 언급하며 “대한민국 국민에 대한 심각한 무시”라고 지적했다. 그는 “어떤 형태로든 역사적 사실을 심각하게 왜곡하는 사람이 있을 수 있지만 그러한 주장은 사상의 자유시장에서 토론과 비판을 통해 정화된다”며 “사람들에게 수용되지 못한 왜곡과 주장은 사회적으로 아무런 영향력을 가지기 어려우므로 처벌의 가치도 없게 마련”이라고 주장했다. 광주 시민단체들도 “다른 5·18 관련 법과 함께 심사할 때 혼란을 빚을 수 있다”며 양 의원이 법안을 철회해달라고 요구했다.

김민호 성균관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입법영향평가 과정을 거쳐야 국민들에게 도움이 되는 법을 만들 수 있다”며 “정부 입법, 시행령 제정 등의 경우 규제개혁위원회에서 규제심사 영향평가를 하는데, 국회도 이러한 과정을 거쳐야 한다”고 제언했다.
/김인엽·박민주기자 inside@sedaily.com

김인엽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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