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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경제소사] 전쟁에 등장한 수소 기구

1794년 플뢰뤼스 전투

1794년 플뢰뤼스 전투에 처음 등장한 수소 기구. 정찰용으로 활용돼 프랑스군의 승리를 이끌었다./위키피디아1794년 플뢰뤼스 전투에 처음 등장한 수소 기구. 정찰용으로 활용돼 프랑스군의 승리를 이끌었다./위키피디아



1794년 6월 26일 오전 7시, 플뢰뤼스(Fleurus·오늘날 벨기에 왈롱 에노주). 한국의 계룡시 크기인 소도시 플뢰리스에서 프랑스군과 대불 동맹군이 맞붙었다. 오스트리아·네덜란드·하노버·영국군으로 구성된 대불 동맹군의 군세는 보병 4만5,000명에 기병 1만 4,000기, 대포 111문. 7만 보병에 1만 2,000 기병, 100문의 대포를 지닌 프랑스군보다 적었지만 가볍게 이길 수 있다고 여겼다. ‘오합지졸로 구성된 프랑스 혁명군대’가 막 점령한 샤를로이를 수복할 것이라고 믿었던 동맹군은 지고 말았다. 양측 사상자는 5,000명으로 비슷했으나 좀처럼 뚫리지 않는 프랑스군을 두고 동맹군은 워털루 쪽으로 달아났다.


프랑스군은 병력을 효율적으로 전개, 동맹군의 주력인 오스트리아의 정예병력을 눌렀다. 특별한 장비 덕분이다. ‘르엔트레프레낭(l‘Entreprenant)’이라는 정찰용 기구(reconnaissance balloon)를 9시간 운용해 적의 움직임을 실시간으로 파악한 프랑스군은 어렵지 않게 승기를 잡았다. 비행기구가 군사적으로 사용된 최초의 사례다. 수소 기구의 등장으로 인간의 전쟁터는 육지와 바다에서 하늘까지 넓어졌다. 플뢰뤼스의 패배로 대불 동맹군은 벨기에 전역에서 물러났다. 프랑스는 북쪽의 네덜란드로 치고 올라갔다. 프랑스가 서부 유럽을 완전히 장악한 것도 이 전투 이후부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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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뢰뤼스 전투는 프랑스 혁명에도 영향을 미쳤다. 프랑스를 위협하는 적국들이 있는 한 혁명정부는 독재 공포정치(Reign of Terror)를 펼쳐야 한다는 주장이 설득력을 잃었다. 전투 한 달 뒤 프랑스에서는 ‘테르미도르의 반동’으로 로베스피에르를 비롯한 자코벵파가 몰락하고 공안위원회의 독재 구조가 깨졌다. 플뢰뤼스의 승리를 이끌었던 상 쥬스트 역시 친구인 로베스피에르와 함께 죽었다. 공포정치가 부르주아 당파의 쿠데타로 사라진 프랑스는 총재 정부와 단독 통령 정부를 거쳐 나폴레옹 황제 체제로 변모해 갔다.

프랑스군도 처음에는 기구의 효과를 기대하지 않았다. ‘발롱(기구)이 아니라 바탈리용(보병대대)이 필요하다며 배속을 거절한 지휘관도 있다. 전투 직전 떠오른 기구를 보고 오스트리아군은 ‘전투에 기구를 사용하는 것은 신사들의 전쟁 규칙을 위반하는 행위’라며 항의했으나 소용 없었다. 기구에 쓰인 수소 생산의 주인공은 앙투안 라부아지에. 물과 공기의 성분을 규명해 ‘근대화학의 아버지’로 기억되는 인물이다. 정작 그는 악덕 세금징수원으로 몰려 플뢰뤼스 전투 한 달 전 길로틴에 목이 잘렸다.
/권홍우선임기자 hongw@sedaily.com

권홍우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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