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을 휩쓴 흑사병(Black Death). 14세기에 등장해 17세기 무렵 갑자기 없어졌으나 원인은 지금까지 규명되지 않았다. 한때는 들쥐를 매개로 여겼지만 가설의 하나일 뿐이다. 흑사병이 창궐한 중세 유럽은 극도의 사회적 혼란을 겪었다. 세상의 중심이던 교회는 처음 보는 전염병을 타락한 인간을 향한 신의 회초리로 여겼다. 대규모 참회 집회와 고해성사 같은 각종 종교 행사가 늘어날수록 흑사병은 되레 빨리 퍼졌다. 종말론과 광신도 활개쳤다. 신의 분노를 풀기 위해 자신을 채찍으로 때리는 ‘채찍질 고행단’도 생겼다. 사방을 돌아다니며 포교하는 이들은 들쥐 이상으로 병균을 퍼뜨렸다.
교황의 자문요청을 받은 천문학자들은 ‘1341년 토성과 화성, 목성이 물병자리에 일직선으로 겹친 천체 이변이 흑사병의 원인’이라고 봤다. 온갖 대책에도 죽어 나가는 사람들을 묻을 땅이 모자라 교황이 강을 축복한 적도 있다. 강물에 시신을 버리기 위해서다. 신분과 학식의 높고 낮음을 떠나 원인도, 해법도 알 수 없는 떼죽음에 대한 불안감은 얼마 뒤 증오로 바뀌었다. 대상은 유대인. 사회적으로 가장 만만하지만 경제적으로는 질시의 대상인 유대인들이 대속양으로 찍혔다.
채찍질 고행단을 비롯한 광신도들은 유대인을 불법 감금해 고문으로 자백을 이끌어냈다. ‘악마의 사주를 받아 남몰래 공공 우물에 병균을 탔다’는 자백이 유럽 각지에서 동시 다발적으로 쏟아지고, 어린 아이와 여자를 포함한 수 많은 유대인들이 학살당했다. 천문학자들의 자문을 구하고 론강을 축복했던 교황 클레맨트 6세는 유대인 학살이 한창이던 1348년 7월 6일 마침내 교황칙령을 내렸다. 훗날 ‘아무리 불충하더라도(Quamvis Perfidiam)’라는 이름을 얻게 된 교황칙령의 골자는 유대인 박해 금지.
‘흑사병의 원인을 유대인에 돌리고 학살하는 행위는 거짓말일 뿐 아니라 악마에게 유혹당한 결과’라는 교황 칙서는 통했을까. 극히 일부의 군주들만 교황 칙령을 따랐다. 오늘날 클레맨트 6세에 대한 평가는 극과 극이다. 아비뇽 교황청을 지나치게 프랑스화했으며 조카들을 추기경에 임명하고 재산을 모았다는 부정적 평가 이면에 문학과 음악을 후원한 르네상스형 교황이었다는 긍정론이 상존한다. 무엇이 맞을지 확신 못해도 그가 내린 특정인종 박해금지령만큼은 정당성을 뛰어넘어 인류의 보편적 가치로 자리 잡았다. 21세기 양심과 지성의 시계는 거꾸로 간다. 전염병의 원인을 남의 탓으로 돌리려는 우리 시대가 14세기의 무지, 광기와 다른 게 과연 무엇인가.
/권홍우선임기자 hongw@sedaily.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