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집권하는 동안 가장 큰 이득을 본 이들은 누구일까요. 확실하지는 않지만 테크기업을 빼놓을 수 없을 겁니다. 지난 2일 기술주 중심의 나스닥 지수는 1만207.63에 마감하며 사상 최고치를 경신했습니다. 이달 들어 사상 최고치 주가를 기록한 애플과 아마존, 마이크로소프트의 시가총액은 최근 1조달러를 돌파하기도 했죠. 특히 트럼프 취임 이후 아마존과 알파벳의 주가는 각각 257%, 79%나 상승했습니다. 주가 상승의 원인을 한 가지로 꼽을 수는 없겠지만, 트럼프 대통령의 친기업 정책이 긍정적인 영향을 미쳤다는 점을 부정할 수는 없을 겁니다. 트럼프는 취임 이후 법인세를 기존 35%에서 21%로 낮추며 대기업에 대한 혜택을 늘리고 각종 규제를 완화하는 등 친기업적 행보를 보였기 때문입니다.
재미있는 사실은 이처럼 주가 상승이 이어지는 가운데에도 대형 테크기업들이 트럼프가 아닌 민주당 대선후보 조 바이든 전 부통령을 지지하며, 그를 위해 아낌없이 지갑을 열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대선을 4개월가량 앞둔 상황에서 테크기업이 이런 행보를 보이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민주당에 기부 84%…왼쪽으로 가는 테크기업
4일(현지시간) CNBC는 트럼프 대통령이 집권하는 지난 3년 반 동안 테크기업들이 법인세 감면 혜택에 힘입어 지배력을 넓혔음에도, 이 기업들의 임직원들은 트럼프를 몰아내는데 어느 때보다도 강경하다고 보도했습니다. 수십 년 동안 기술 산업, 특히 실리콘밸리와 시애틀이 좌편향된 행보를 보였던 것은 사실이지만 지금처럼 한쪽으로 치우친 적은 없었다는 것이 CNBC의 설명입니다.
이 같은 행보는 숫자로도 나타납니다. 비영리조직인 책임정치센터(Center for Responsive Politics)의 오픈시크릿 웹사이트에 따르면 애플과 마이크로소프트(MS), 아마존, 알파벳, 페이스북 등 5대 테크 기업의 직원들이 공화당 후보에 기부한 금액은 300만달러가 채 되지 않는 데 반해, 민주당 후보들에 기부한 금액은 1,500만달러에 육박합니다. 민주당이 전체 직원 기부의 84%를 가져간 셈인데, 지난 2016년 민주당이 차지한 비율이 68%, 2018년 중간선거 당시가 79%였던 점을 고려하면 불과 4년 새 대폭 증가한 셈이죠. 공화당과 민주당이 아닌 트럼프와 바이든으로 대상을 좁히면 격차는 더욱 커집니다. 오픈시크릿에 따르면 바이든이 사실상 민주당 후보로 확정된 뒤, 바이든은 기부금의 92% 이상을 테크기업으로부터 모집했기 때문이죠.
지난 1995년부터 어도비에서 모바일 앱 개발자로 일하고 있는 조나단 브라운이 대표적 사례입니다. 이 회사의 주가는 올해에만 35%, 트럼프 취임 이후 4배가량 상승하며 시가총액이 2,000억달러를 돌파했습니다. 하지만 그는 현재 정부의 행보에 만족하지 않습니다. “어도비의 주가가 사상 최고치를 기록할 때 동시에 경제가 큰 타격을 입었다는 사실에 화가 날 뿐이다. 내 자산의 일부를 활용해 정치를 올바른 방향으로 움직여야 한다는 책임감을 느끼고 있다.” 그는 실제로 최근 민주당 소속의 자말 바우만과 일한 오마르 의원에게 각각 500달러를 기부하기도 했습니다. 대통령 예비선거에서는 민주당 소속의 엘리자베스 워런을 지지했죠. 브라운이 원래부터 정치인 후원에 열성적이었던 것은 아닙니다. “올해는 내가 정치 후원에 관심을 기울인 첫해입니다. 이전에는 비영리단체에 기부했죠.”
트럼프가 이끈 왼쪽 행보? 힐러리 기부금 트럼프보다 60배 많아
CNBC는 이 같은 흐름이 트럼프부터 더욱 강하게 나타나고 있다고 분석합니다. 테크업계는 역사적으로 사회문제에 대해서는 진보적이었지만 국가재정과 관련해서는 보수적이었습니다. 이 때문에 과거 공화당 소속의 미트 롬니나 존 매케인, 조지 W 부시를 지지했죠. 하지만 2016년 트럼프가 등장하면서 이런 모습이 바뀌었습니다. 실제로 지난 대선 당시 트럼프의 상대 후보였던 힐러리 클린턴은 시애틀과 샌프란시스코 베이 에어리어 대부분에서 승리했는데, 앞서 버락 오바마 전 대통령보다 더 많은 지지를 받았다고 합니다. 당시 5개 테크기업의 직원들은 트럼프보다 힐러리에 60배나 많은 기부금을 지급했죠.
정치적으로 오른쪽에 치우쳐있던 일부 테크기업들도 민주당으로 방향을 틀고 있습니다. 지난 2016년 당시 오라클의 직원들이 민주당에 기부한 금액은 전체의 49%였지만, 현재는 67%에 달합니다. 시스코의 경우는 같은 기간 36%에서 80%로 급증한 상태입니다.
미국의 매력 사라져…두려움 맴도는 테크업계
사실 테크기업과 트럼프와의 관계는 처음부터 그리 좋지 않았습니다. 트럼프가 벌였던 반이민 캠페인과 무슬림 여행 금지령, 샬러츠빌에서 벌어진 백인우월주의 집회 당시의 모호한 태도 등은 테크업계의 마음을 떠나게 했죠. 여기에 일관성 없는 형태로 중국과의 무역전쟁을 벌인 것이 결정타가 됐다는 설명입니다.
익명을 요구한 샌프란시스코의 한 기술 금융 기업 임원은 현재 동료들 사이에서 ‘두려움’이 크게 자리 잡고 있다고 전했습니다. 그의 회사와 업계는 인재들의 이민과 합리적인 무역정책을 기대하고 있는데, 현재 미국은 이런 면에서 매력을 잃고 있으며 오히려 무서운 곳으로 전락하고 있다는 것이죠. 이 같은 두려움 때문에 이 임원은 바이든은 물론 민주당 소속의 더그 존스 상원의원과 반 트럼프 보수성향 정치활동위원회인 링컨 프로젝트에도 기부했다고 밝혔습니다.
이 때문일까요. 마가렛 오마라 워싱턴대 역사학과 교수는 테크업계가 어느 때보다도 정치화돼있다고 말합니다. 테크기업의 직원들은 그들의 상사에게 투명성과 책임을 적극적으로 요구하고 있으며, 이제는 지갑을 가지고 투표에 나서고 있다는 겁니다.
직원들뿐만이 아닙니다. 테크기업의 임원들도 목소리를 내고 있습니다. 시스코 시스템즈의 최고경영자(CEO)인 척 로빈스는 지난 5월 말 트위터를 통해 ‘흑인의 생명도 중요하다(Black Lives Matter)’ 운동에 참여하기도 했죠. 이후에는 관련 단체 등에 500만달러를 기부하고 있다고 밝히기도 했습니다.
대선 앞둔 테크기업의 선택은
물론 모든 테크기업이 정치적인 행보를 보이는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무작정 ‘모르쇠’ 전략을 쓰기도 쉽지는 않아 보입니다. 페이스북이 최근 트위터와 달리 페이스북에 게재된 트럼프의 혐오발언을 제재하지 않겠다고 밝혀 광고주들의 보이콧에 시달리고 있는 것이 대표적입니다. 이런 상황에 대해 정치 컨설팅 회사인 풀 서클 스트래티지스의 조카타 에디 CEO는 CEO들이 행동에 옮기도록 강요받고 있다고 설명합니다.
대선을 4개월여 앞둔 시점에서 테크기업들이 얼마나 더 적극적인 행보를 보일지, 그들의 행보가 선거에 얼마나 영향을 미칠지 주목할 필요가 있어 보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