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차 세계대전 이후 약 1세기 동안 동아시아의 질서를 주도했던 ‘팍스 아메리카나’ 체제가 흔들리고 있다. 2008년 세계 금융위기를 극복한 중국이 서방 경제체제의 약점을 파고들며 확장적 대외 정책을 펼치면서 이를 저지하기 위한 미국과의 충돌이 벌어지고 있다. 패권을 차지하기 위한 미중 갈등은 교역권과 육상과 해상 수송로, 4차 산업혁명 시대의 핵심기술 장비 사용 등 광범위하게 전개되고 있다.
미중 패권전쟁의 최전선에 있는 한반도의 불확실성과 불안정성도 덩달아 높아지고 있다. 대변환 시대의 파고를 넘기 위해 가장 먼저 해야 할 것은 항로를 제대로 잡는 것이다.
가장 경계해야 하는 것은 미중 패권전쟁 속에서 우리의 진로에 혼선을 겪는 일이다. 한국은 그간 미중 사이에서 어느 진영에도 속하지 않는 ‘전략적 모호성’이라는 노선을 견지해왔다.
그러나 외교에는 흔들림 없는 원칙이 중요하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지적이다. 특히 미국과 중국의 강요된 선택 앞에 선 한국은 미국과의 정치적 민주주의 유대와 중국과의 경제적 자유시장 협력 관계 유지를 원칙으로 삼은 외교를 지향할 필요가 있다. 신범철 한국국가전략연구원 외교안보센터장은 “중국과 등을 돌리면 기업들이 어려워지기 때문에 중국과의 관계는 유지하되 무게중심을 미국에 둔 균형 외교를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사실 그동안 한국은 미중 간의 이슈가 있을 때마다 극도로 신중한 모습을 보였다. 미국과 중국이 각각 내세우고 있는 인도·태평양전략과 일대일로 참여 요청을 받은 한국이 양측의 전략적 노선과 신남방정책에 공통점을 들어 양국과 제휴할 수 있다고 주장하고 있는 상황이 이를 잘 대변한다. 하지만 이 같은 한국의 모습은 상대국에 기회주의적 태도로 비칠 수 있다. 실제 한국은 과거 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THAAD·사드) 한반도 도입 문제를 놓고 미중 사이에서 위험한 줄타기를 하다 큰 낭패를 겪은 바 있다. 미 국방부는 2014년 6월5일 “한국 정부에서 사드 관련 정보를 요구했다”고 발표했다. 이에 중국이 이듬해인 2015년 초 사드 한반도 배치 반대 입장을 분명히 하며 미중 갈등 이슈가 불거졌다. 당황한 한국 국방부 2015년 3월 사드 구매계획이 없다는 입장을 냈지만 이후 북핵 문제 등을 이유로 2017년 사드 도입을 전격 발표했다. 중국은 한국의 결정에 반발해 관광 및 경제 분야 등 광범위한 보복조치를 단행했고 한중관계는 급속히 얼어붙었다.
사드 논란을 지켜본 전직 외교관은 당시를 회상하며 “처음에는 사드 배치를 안 한다고 했다가 이를 번복하고 사드 배치를 미국에 떠밀려 졸속으로 결정했다는 뉘앙스를 중국 측에 준 것이 문제”라며 “미중 사이에서 선택하는 것은 정말 어려운 결정이지만 그 결정을 면밀하게 검토하고 국론을 모은 뒤 중국에 이를 솔직하게 설명하고 이해를 구했어야 했다”고 안타까워했다.
한국이 중국과의 관계 개선을 위해 ‘사드 추가 배치’ ‘미국 MD 참여’ ‘한미일 동맹’을 하지 않는다는 3불 입장을 낸 것도 원칙 없는 외교를 대표하는 사례다. 중국을 달래기 위한 3불 입장은 한미일 안보협력을 중심축으로 중국을 견제하려는 미국의 인도·태평양전략과 충돌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박원곤 한동대 국제지역학과 교수는 “선택의 순간이 다가왔고 이미 그 시기가 지났다”며 “자유민주주의 원칙을 유지하는 게 맞다. 그러면 실질적으로 7대3 비율로 미국을 중시하게 된다. 그 원칙과 규범을 바탕으로 개별 사안에 대해 대응하는 게 필요하다”고 제언했다.
앞으로 다가올 미중 패권전쟁은 과거 사드 논란 때보다 훨씬 격렬하고 동아시아 지역 내 국가 간 생존을 위한 합종연횡을 부추길 가능성이 높다. 사드 사태처럼 한국이 원칙 없는 외교로 일관한다면 국가의 장래는 위태로워지게 된다. 이미 한국의 선택을 강요하는 미중의 압박은 피부로 느껴질 정도로 선명하다. 미국과 중국 모두 핵무기를 보유한 국가인 만큼 양국의 전쟁은 군사 분야보다 경제 분야를 중심으로 전개될 가능성이 높다. 미국은 한국에 글로벌 공급망의 탈중국을 목표로 한 반중 경제블록 ‘경제번영네트워크(EPN)’ 참여를 촉구하고 있다.
결국 한국은 자유민주주의, 인권, 공정무역, 법치주의 등 우리의 생존가치를 공유하는 미국을 무게중심에 둘 수밖에 없다. 무엇보다 중국이 현 공산당 일당 중심의 독재체제를 유지하는 한 이는 한국에 기회보다 장기적으로 위협이 될 것이라는 우려가 끊이지 않기 때문이다. 더욱이 중국은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사태와 홍콩보안법 문제로 개방성과 투명성·인권 등 한국의 생존가치를 공유하는지에 대한 의구심이 커지고 있다. 신 센터장은 “중국 포비아처럼 한국이 중국에 대해 너무 겁먹고 있는 것 같다. 인권 문제 등 자유민주주의 가치를 훼손하는 행위에 대해 할 말은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한국이 보편적 자유민주주의 질서를 내세운 외교의 대원칙을 세우면 향후 대미 협상에서도 유리한 고지를 점할 것이라는 주장도 있다. 특히 투명성과 개방성·인권 등을 중시하는 조 바이든 전 부통령이 오는 11월 미 대선에서 승리할 가능성이 점쳐지고 있는 만큼 한국의 대원칙이 미 조야에서 더 힘을 발휘할 것이라는 분석에서다. 차두현 아산정책연구원 수석연구위원은 “한반도 국제문제에 대해 그 원칙에 맞게 행동하면 큰 문제가 없다”며 “자유무역·개방성·인권 등 그 사안에 따라 우리 입장을 표명하면 된다. 특히 바이든이 당선되면 더더욱 그런 입장 자체가 트럼프 때보다 더 중요하게 먹힐 수 있다”고 진단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