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쾌대(1913~1965)가 1940년대에 그린 ‘자화상’에서 화가는 서양식 중절모에 푸른 도포를 휘날리는 복장이다. 한 손에는 팔레트, 다른 한 손에 동양화 붓을 쥔 그의 뒤로 마치 레오나르도 다빈치가 그린 ‘모나리자’의 배경과도 같은 풍경이 펼쳐지는데, 저 멀리 작은 길을 따라 한복 차림에 소쿠리를 머리에 이고 걸어가는 아낙들의 모습은 영락없는 우리네 아낙이다. 세계 3대 아트북 출판사로 유명한 영국의 파이돈(PHAIDON)이 최근 출간한 ‘1953년 이후의 한국미술:균열,혁신,교류(Korean art from 1953: collision, innovation, interaction)’는 바로 이 그림으로 전후 한국 근현대미술의 첫 걸음을 내딛는다. 미술사학자 박계리가 쓴 첫 장(章) ‘한국 근대미술과 전통과 모더니티의 갈등, c.1953’을 시작으로 킴벌리 정 캐나다 맥길대 교수의 마지막 장 ‘장소의 질문들:1980년대 후반과 1990년대 재미 한국인 작가의 예술’까지 13편의 글은 1953~1987년까지의 한국 아방가르드와 근대성부터 1988년 이후 바로 지금까지의 한국 현대미술을 관통한다.
책의 대표 저자인 미술이론가 정연심 홍익대 예술학과 교수를 필두로 큐레이터인 김선정 광주비엔날레재단 대표이사, 미술사학자 킴벌리 정 교수, 시각문화학자인 키스 와그너 영국 런던칼리지 교수 등 4명이 공동 에디터로 출간을 이끌었다. 필진으로는 박계리,김이순,신정훈,이영준,홍지석,고동연,최정은 등 미술사 연구자인 각 분야 전문가들이 함께했다. 책은 1960~70년대의 역사적 맥락에서 실험미술부터 작가집단의 활동까지 아방가르드 예술을 짚어보고, 1970년대의 단색조 추상미술인 ‘단색화’, ‘현실과 발언’의 민중미술을 분석하는가 하면 민주화 과정을 통해 본 사진예술의 역할을 비롯해 ‘조선화’로 주로 알려진 북한미술까지도 상세하게 다뤘다. 이후 민주화의 진일보, 1988서울올림픽을 거치며 사회적 변화와 함께 한국미술도 세기적 전환, 새로운 포스트모던 세대의 예술을 보여주기 시작했고 광주비엔날레·부산비엔날레·미디어시티서울 등 국제미술제를 통해 세계화에 발맞추고 나아가 선도하게 됐다. 여성 인체의 역설적 지위를 드러낸 한국의 페미니즘 예술, 미디어 아트 등 세세한 분야를 다루기도 하지만 한국 현대미술을 세계 미술의 맥락에서 어떤 위치에 놓고 봐야할지 진지하게 질문하고 이를 학술적으로 탄탄하게 풀어내기도 했기에 두툼한 책에 실린 글 하나하나가 알알이 빛난다.
“대단한 신간인 ‘1953년 이후의 한국미술’은 지금까지의 한반도 근현대미술을 조망하는 가장 중요한 영어 개괄서다. 많은 부유한 나라들이 자국의 이미지를 위해 예술·음악·영화 등을 이용하는 가운데, 한국의 문화 소프트파워는 두말할 나위 없는 챔피언급이다. 유튜브에서 10억뷰를 기록한 첫 번째 노래인 ‘강남스타일’을 비롯해 방탄소년단(BTS)과 루나를 비롯한 K팝 밴드, 그리고 오스카상을 수상한 봉준호의 ‘기생충’까지 강렬하게 뻗고 있다. 한국의 화장품,음식,패션,가전제품 등 지구상에서 인구 5,100만인 이 나라의 문화적 영향을 받지 않는 나라는 없다 해도 과언 아니다. ‘단색화’의 추상화가들이 뉴욕의 블루칩 갤러리에서 정기적으로 전시하는가 하면 지난해 10월 재개관한 뉴욕현대미술관(MoMA)은 한국미술가 양혜규의 작품을 가장 눈에 띄는 공간에 배치했다. 그러나 미국 관객들은 중국이나 일본에 비해 한국 현대미술의 전모 접할 기획가 거의 없었다.”
이 책이 출간되자 미국 3대 일간지 뉴욕타임즈는 지난 6월25일(현지시간)자 문화면 기사를 이같이 시작하며 전면을 할애해 세세한 내용을 소개했다. NYT에 소개된 후에는 책이 아마존 예술서적 부문에서 베스트셀러 1위에 오르기도 했다. K팝·K무비·K드라마 등 다른 한류에 비해 상대적으로 두각을 보이지 못했던 한국미술의 K아트가 한류로 새롭게 도약할 계기를 마련한 것이라 기대를 모으고 있다. 전후 한국 현대미술을 최근 경향까지 포괄적으로 소개한 영문판 서적은 처음인 데다, 작품 감상 수준의 인상비평을 넘어선 학술 서적이면서도 총천연색의 도판들을 410여점이나 대거 수록해 눈길을 끈다. 예술경영지원센터의 한국미술 해외출판 지원을 받은 이 책은 미국과 유럽에서 먼저 출간됐지만 국내 주요 온라인서점을 통해서도 구입할 수 있다.
책의 시작은 김선정 광주비엔날레재단 대표이사와 정연심 교수의 5년 전 ‘무모한 도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아니, 그보다 수년 더 앞서 각자의 고민이 있었다. 지난 6일 아트선재센터에서 만난 정 교수는 “2007년부터 3년간 뉴욕주립대에서 한국 현대미술을 가르쳤는데 중국, 일본에 비해 한국미술사에 관한 영문 서적은 김영나 교수의 20세기 미술사, 브리티시뮤지엄이 출간해 전통미술부터 북한미술까지 포괄한 책이 있을 뿐 상대적으로 극히 적다는 사실에 상심했다”면서 “특정 작가들의 개별 카탈로그만 있고 전후 한국미술의 다양한 스펙트럼을 보여주는 책은 거의 없어 언젠가 꼭 쓰리라 생각했다”고 오래 전 결심을 말했다. 김선정 대표는 “지난 2009년 미국 LA카운티미술관(LACMA)에서 ‘당신의 밝은 미래’라는 대규모 한국 현대미술전을 기획했었는데 작가들 나름의 강조점이 있는데도 서구 관객의 시선에서는 우리 미술이 마치 비엔날레의 유행을 좇는 것으로 보이는 게 안타까워 반드시 우리 현대미술을 알릴 미술사책이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던 것이 계기였다. 지난 2015년 국립아시아문화전당이 개최한 심포지엄에서 각각 오전·오후 세션을 이끌며 깊이있는 대화를 나누던 두 사람이 전후 한국 근현대미술의 개론서를 만들어보기로 의기투합 했다. 책은 이후 5년 여 긴 시간의 성과다.
예상했던 것 이상으로 책이 주목받는 이유에 대해 정 교수는 “2010년대부터 서양 중심이던 문화적 규율이 무너지고 동양 혹은 여성으로 눈돌리면서 서구적 미술사를 반성하는 움직임이 일었다”고 했고 김 대표는 “최근에는 흑인인권운동, 식민주의자의 동상이 무너지는 등 미국 내에서도 소수의, 혹은 다른 문화와 나라에 대한 관심이 증폭한 것이 결정적인 듯하다”고 말했다.
책의 부제 격인 ‘균열,혁신,교류’에 대해 정 교수는 “갈등의 틈을 비집고 힘을 내고, 그것을 혁신으로 새롭게 하고 교류를 통해 확장시키는 것이 바로 한국미술, 우리 현대미술의 힘”이라 말했고 김 대표는 “서양미술사를 서양 것으로만 여길 것 아니고, 우리를 동양이라는 틀로 묶을 필요없이 우리 한국 미술가들은 그 모두를 다루고, 얘기하고 활용하고 있다”고 강조했다.
두 사람은 “시대적, 내용적으로 방대한 작업인데다 요즘은 통사적인 역사서보다는 전문가 여럿이 팀웍을 발휘해 쓰는 학술 연구의 결과물이 부각되는 추세”라면서 “흔히 미술사책은 화집이나 커피테이블북(거실 탁자에 놓여 주인의 취향을 드러내는 책)으로 통하지만 이 책은 그림이 많으면서도 다양하고 다이내믹한 한국 현대미술을 학문적으로도 잘 보여줄 수 있다”고 덧붙였다.
해외에서 뜨거운 반응을 얻고 있지만 이 책의 한국어판을 만나기는 쉽지 않을 전망이다. 정 교수는 “파이돈 특이 1쇄 기본이 1만부인데 최소 수준인 6,000부로 발간했는데 한국 출판시장에서 미술서적의 입지는 2,000부조차 힘들다”고 안타까움을 토로했다. 그럼에도 그는 “최근 10년 새 한국현대미술로 논문 쓰는 외국인 연구자들이 많아졌기에 향후 10년 내 다양한 한국미술 책이 나올 것 같다”고 했고 김 대표 역시 “한국 미술가도, 이들을 후원하는 갤러리스트도 탁월한데 정작 이론적으로 뒷받침해 줄 학술연구와 평론이 부족했는데 이번 계기로 한국미술사가 세계 미술사에서 어떤 위치를 차지하는지 그 역할을 다시금 새겨줄 것”이라고 말했다. 이들은 “원래는 책에는 건축, 미디어아트, 인터넷 세대의 예술 등이 더 있었고 백남준에 대한 별도의 장, 북한미술에 관한 새로운 연구논문도 준비중이었으나 시간과 분량 등의 문제로 수록하지 못했다. 다음 번 책에서는 이런 부분을 꼭 다룰 것”이라고 힘줘 밝혔다.
사진 이호재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