먹그림으로 시작해 바람에 나부끼는 댓잎이 들썩이는 인간의 형태로 발전한 이응노(1904~1989)의 작업은 감옥에서 더욱 단단해졌다. 동베를린 간첩단 사건으로 옥고를 치르던 그는 먹고 남은 간장으로 신문지에 그리고, 밥풀로 조각을 빚었다. 국가 폭력의 전형적 유형인 정치적 음모로 고초를 겪었지만 그는 폭력에 복수·분노로 앙갚음 하는 대신 생명예찬의 작업으로 이겨냈다. 1970년작 목조각인 ‘군상’은 흡사 늙은 몸뚱이에서 근육은 다 빠져나가고 살가죽이 붙어 드러난 뼈마디처럼 애처로우면서도 둥글둥글 서로 맞붙은 조형적 미감으로 온기를 전한다.
교과서에서 ‘우리나라 최초의 여성 서양화가’로 소개되는 나혜석은 가부장제라는, 100년이 지난 지금도 완강한 사회적 벽에 맞섰다. 고민 많아 보이는 나혜석의 자화상 옆에 그가 그린 삽화가 확대돼 걸렸다. 길 가는 신여성을 향해 수군거리는 갓 쓴 남성들의 손가락질이 액자 너머 자화상의 여성 화가에게까지 꽂힌다. 저항적 태도가 그대로 작업이 됐다. 소시민의 삶과 사회의 부조리를 눈여겨 본 조각가 구본주는 날아다닐 정도로 바삐 살아가다 정작 퇴근길에는 오도 가도 못할 벽구석으로 몰린 회사원을, 누구나일 수 있는 그 모습을 작업으로 남겼다.
서울대학교미술관이 기획전 ‘판데믹의 한 가운데서 예술의 길을 묻다-작업’을 통해 14명 작가의 80여 작품을 선보이고 있다. “처음 생각했던 전시제목은 ‘태도가 작업이 될 때’였다”고 밝힌 심상용 서울대미술관 관장은 “이들 작가는 경험에서 오는 태도와 그로 인한 예술작업의 속성으로 자신들을 재빨리 당대 흐름에 편승시키거나 영웅이 되는 것 대신 오히려 더디고 어렵게 만들었는데 바로 그 ‘더딤’과 ‘지연’으로 인해 그들은 예술작업자(Art Worker)가 될 수 있었다”고 소개했다. 이는 스위스 출신 큐레이터 하랄트 제만이 1969년 기획한 전설적 전시 ‘태도가 예술이 될 때’를 떠올리게 한다. 20세기 후반의 이 결정적 전시 이후 “태도만 있으면 그것이 무엇이건 예술이 되는 ‘머릿속’ 예술”이 현대미술의 주류가 됐다.
그러나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의 확산으로 신체의 제약, 몸과 경험의 의미가 새삼 부각되면서 ‘미술가의 작업은 무엇이 특별한가’를 되돌아보는 계기로 마련된 게 바로 이 전시다. ‘아이디어’가 예술가의 고단한 노력과 작업의 과정을 무력하게 만드는 최근 사법 판결 등에도 경종을 울리는 전시다. 심 관장은 “작업은 태도에서 오지만, 태도가 예술인 것은 아니다”면서 “태도가 예술이 되기 위해서는 ‘작업’이라는 존재론적 번역과 물리적, 혹은 신체적 구현 과정을 거쳐야 하며 제만의 ‘태도가 형식이 될 때’는 이 결정적인 과정에 대한 무지에서 비롯된 과소평가의 산물”이라고 강조했다.
‘광부화가’ 황재형은 타인의 고통을 몸소 체험해야 하는 것을 당연히 여겨 27세 때 태백으로 가 탄광의 막장을 확인했고 지금도 그곳에서 작업한다. 이진우 작가는 숯 위에 한지를 여러 겹 바른 후 철 수세미로 끊임없이 두드려 작품을 완성한다.
수백 개 나침반 위에 낡은 자동차의 운전대 부분을 올려놓은 김승영의 설치작품은, 어디를 향하는지 알려주고 어디든 갈 수 있는 핸들을 잡고도 방황하는 현대인의 심금을 울린다. 위대한 업적을 위해 만들어지는 기념비를 무명씨를 위한 ‘사소한 기념비’로 만드는 홍순명 작가는 팽목항을 7번이나 오가며 주워 모은 돌멩이와 나뭇가지, 부표와 쓰레기들을 뭉쳐 캔버스로 감싸 ‘버려진 것’들이 목격했을 풍경들을 그렸다. 전시장에서 만난 홍 작가는 “코로나로 외국 레지던시나 해외 전시에 나갈 수 없게 됐지만, 혼자가 익숙한 게 예술가들인지라 오히려 작업실에 틀어박혀 작업에만 집중할 기회가 됐다”고 말했다. 전시는 9월20일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