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사내칼럼

[여명]홀로코스트 산업

■최형욱 온라인담당 부국장

일부 진보, 도덕적 자산 독점

공정·정의에 선택적이더니

이젠 피해자 연민도 선택적

어쩌다 이렇게까지 타락했나

최형욱 온라인담당 부국장최형욱 온라인담당 부국장



미국 내 유대인 엘리트들은 2차 세계대전 직후만 하더라도 이스라엘 건국과 독일 나치의 동족 말살에 무관심했다. 오히려 이들은 미국 백인 주류의 입맛에 맞춰 동서 냉전의 전초기지가 된 서독의 재무장을 적극 지지했다. 반전은 지난 1967년 3차 중동전쟁(6일 전쟁)으로 찾아왔다. 미국은 중동 내 대리인으로서 이스라엘의 전략적 가치에 주목했고 대규모 군사적·경제적 원조를 단행했다.

이는 미국 내 유대인들에게도 단지 ‘차별받지 않는 유일한 비주류’라는 지위에서 권력의 한 축이 될 수 있는 기회였다. 유대인인 노르만 핀켈스타인 교수의 저서 ‘홀로코스트 산업’의 표현을 빌리자면 ‘뜻밖의 횡재’를 만난 셈이었다. 이후 희생자들의 비극적인 기억으로만 남아 있던 홀로코스트는 초대형 돈벌이로 변질됐다. 아우슈비츠 수용소 학살과 생존자의 슬픔이라는 ‘윤리적 자산’은 돈과 권력에 이르는 지름길이었다.


이들은 독일 정부 보상금 600억달러 이외에도 독일 민간기업, 책임소재가 불분명한 스위스 은행들로부터도 배상금을 뜯어냈다. 그 천문학적인 보상금은 다 어디로 갔을까. 희생자들에게는 푼돈이 지급됐다. 나머지는 피해자도 아니었던 소수 유대인 지도자들의 고액 연봉과 변호사 비용, 재단 설립, 교육사업 등에 쓰였다. 수십억달러의 자금은 행방조차 묘연하다. 우리나라에서도 한두달 전까지 정국을 달궜던 모 국회의원과 모 단체가 연상된다.

나아가 미국 내 유대인 엘리트들은 정치적·상업적 목적 아래 홀로코스트를 신성화했다. 원래 대학살을 뜻했던 홀로코스트는 아일랜드·아르메니아·캄보디아·소련·인도·중남미 등에서 인류가 저지른 다른 학살과도 차별화된 고유명사가 됐다. 이스라엘의 인종차별과 팔레스타인인 학살, 미국의 대중동 정책, 유대인 단체의 회계부실에 대한 비판은 홀로코스트를 부정하는 비인간적인 행위로 공격받았다.


일부 이스라엘인들은 2009년 가자지구에 떨어지는 폭탄 공격을 언덕에서 쌍안경으로 스포츠 경기처럼 관람하며 환호성을 지르는 지경에 이르렀다. 이들에게는 폭격이 끝난 뒤 피투성이 시신 옆에서 엄마나 아들이 울부짖는 장면을 떠올릴 만한 공감 능력이 사라졌다. “우리 편의 고통은 보편적이다. 반면 적의 고통은 우리와는 질적으로, 윤리적으로 다르다.” ‘도덕적 면허’를 가졌다는 착각에 타인의 비극에 대한 인간적인 연민까지 잃어버린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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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불어민주당은 고(故) 박원순 전 서울시장이 스스로 목숨을 끊자 ‘님의 뜻 기억하겠습니다’라며 추모 분위기를 조성하는 데 열을 올렸다. 각종 정부위원회에서 밥벌이를 하는 일부 시민단체와 여성단체 관계자들도 처음에는 눈치를 보느라 바빴다. 정권이 ‘사건을 덮어라’라는 신호를 주자 친문 세력들은 피해자에 대한 ‘2차 가해’로 측면 지원하는 중이다. 비록 여당이 심상치 않은 여론에 뒤늦게 마지못해 사과했지만 진정성을 의심받고 있다. 이제 도덕적 우월감에 빠진 친문 세력은 자기 진영에 불리하면 피해자들까지 공격할 지경에 이르렀다. 위안부 피해자인 이용수 할머니가 정의기억연대의 각종 문제점을 지적하다 졸지에 ‘토착 왜구’ ‘치매 할매’ ‘대구 할망구’로 몰린 것이 단적인 사례다.

조국 전 법무부 장관 사태에서 시작된 일련의 사건들은 권력 집단이 도덕적 위선에 빠졌을 때 얼마나 치명적인 부패와 전체주의 유혹에 빠지는지 보여준다. 이들은 인맥과 학연, 정서적 유대감으로 묶여 끼리끼리 한자리 챙겨주다 보니 여러 권력형 비리 의혹에 걸핏하면 이름을 올린다. ‘공적 자아’는 정의의 사도인데 ‘사적 자아’는 강남 아파트를 소유하고 싶은 속물이라는 ‘위선의 매트릭스’를 비판하면 적폐 세력의 공격쯤으로 치부한다.

일부 586인사들은 이미 권력과 돈까지 손에 쥔 기득권 집단이 됐는데도 여전히 희생자·약자 흉내를 낸다. 새로운 시대적 어젠다를 창출할 능력이 안 되다 보니 젊은 시절 반독재·반제국주의·반독점 투쟁의 추억에 기대어 국정을 운영한다.

당연한 결과로 정의와 공정에 대한 잣대도 선택적이다. 심지어 이제는 피해자에 대한 공감이나 연민도 진영 유불리에 따라 선택적이다. 도대체 한때는 순수한 청년이었던 이들이 어쩌다 이렇게 타락했을까. 이들이 역사적 비극과 민주화 동지들의 희생을 오롯이 사유화해 정치적 자산으로 삼고 심지어 산업화하는 순간 이 같은 비극은 이미 예정됐던 것인지도 모르겠다. choihuk@sedaily.com

최형욱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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