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금융 정책

'최초의 경제정론지' 서울경제, 희망의 100년 보며 달려온 60년史

1960년 8월 창간…80년 강제 폐간 이후 8년만에 복간

70년대 경제지 시장 70% 이상 점유…석간 발행하기도

88년 8월 복간 이후 월요일자 발행등 혁신

전국민 주식갖기운동·경제소사 등 호평

2007년 SEN TV 출범, 2010년 서울포럼 시작

블록체인 '디센터', 시그널, 라이프점프 등 출범

수요회 멤버들. 왼쪽부터 김봉진, 송인상, 나익진, 백상 장기영 창업주, 김기엽, 김광균, 김영휘수요회 멤버들. 왼쪽부터 김봉진, 송인상, 나익진, 백상 장기영 창업주, 김기엽, 김광균, 김영휘



희망의 100년을 보며 달려온 60년

‘국민경제의 전체적 이익을 대전제로 하여 시시비비(是是非非)에 철두철미할 것.’


대한민국 최초의 경제정론지로 태어난 서울경제신문은 1960년 8월1일 창간사에서 ‘경제의 안정·부흥을 통한 국민경제의 자립화’를 긴급한 과업으로 내걸었다. 다수의 이익을 대변하는 편에 서 이 나라의 경제 저널리즘을 정상(正常)한 방향으로 이끌고 나가는 데 일조(一助)가 될 것을 맹세했다. 서울경제의 지난 60년은 대한민국 현대사의 뼈아픈 시련과 함께했던 역경의 과정으로 응축된다.

국내 최초의 경제정론지로 출발

1960년에는 정치가 불안정하고 어수선했다. 3·15부정선거가 4·19학생혁명으로 이어지면서 자유당 정권은 막을 내렸다. 민주당 정권은 경제제일주의를 내세웠으나 혼란은 더 극심해졌다. 서울경제는 이러한 분위기에서 태어났다. 서울경제 창간호 1면 머리기사 제목은 ‘경제 9월 위기, 갈수록 심화-물가 15% 앙등·생산 3.8% 위축’이었다. 시작부터 우리 경제에 대한 경고를 아끼지 않았다. 창간호부터 100회에 걸쳐 연재된 ‘경제백서’와 1960~1970년대를 가로지른 ‘경제교실’은 독자들의 경제교과서였다. 경제에 대한 이해가 부족하고 관련 서적도 마땅히 없던 시절, 당시 주력산업이었던 광업에서 농업·금융·제조업까지 한국 경제의 실태를 생생히 전달하고 개선방향을 제시했다. 또 전직 경제부처 장관, 은행장, 재벌 총수들이 번갈아 집필한 ‘재계회고’ 시리즈 또한 필독 칼럼이었다.

서울경제도 석간을 발행하던 시절이 있었다. 창간 이래 조간이었던 서울경제는 1969년 1월21일 석간으로 전환했다. 1972년 10월3일자부터 조간으로 돌아오기까지 3년9개월이라는 적지 않은 기간에 석간으로 발행됐다. 서울경제를 찾는 독자가 많아 한국일보와 조석간을 나누겠다는 의도가 컸다.



1960년 서울경제신문 창간호1960년 서울경제신문 창간호


철권통치가 내린 강제 종간에도 8년 만에 부활




1970년대까지 서울경제는 정책결정과 여론형성을 주도하는 독보적인 경제정론지로서 당시 경제지 시장의 70% 이상을 점유하고 있었다. 정권 장악을 위해 언론을 길들이려던 신군부는 1980년 언론 통폐합을 강행하며 서울경제를 폐간시켰다. “서경이 없어지면 한국에서 경제신문이 없어지는 것”이라는 각계각층의 우려가 쏟아졌으나 하루아침에 펜을 꺾어야 했다. 서울경제 폐간의 이유는 ‘타 언론사와의 형평성을 고려, 폐간’이라는 단 한 줄이었다. 한국일보그룹은 결국 한국일보와 서울경제 중 택일하라는 압박을 이기지 못했다. 11월25일 서울경제의 1면 제목은 ‘본지 오늘로 종간(終刊)’. 지령 6,390호를 마지막으로 창간 21년3개월25일 만이었고 이후 7년9개월의 시간을 강탈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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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통과 시련의 시간을 거쳐 1988년 8월1일 서울경제는 복간했다. 총 32면으로 발행된 복간호 1면 머리에 ‘새 시대 새 모습으로 거듭나다’라는 제목의 복간사를 배치해 부활의 소회와 각오를 담았다. 이후 경제지 최초의 월요일자 발행(1990년 3월5일), 경제지 최초의 인터넷신문 창간(1996년 1월16일) 등 판도를 바꾸는 시도를 이어왔다. 외환위기 직후에는 ‘전 국민 주식 갖기 운동’을 펼쳐 IMF 외환위기 조기졸업을 도왔다. ‘오늘의 경제소사’는 복간 이후 게재된 시리즈 중 최장(最長)인 만 5년9개월간 7,163회가 연재됐으며 독자들의 호평에 힘입어 부활하기도 했다. 서울경제의 강제폐간을 조사했던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는 2010년 국가의 사과와 피해구제를 위한 적절한 조치가 필요하다는 권고안을 내놓으며 불명예를 씻어줬다.



박정희 대통령이 1966년 1월 1일자 서울경제신문에 특별히 써준 휘호. “爲(위)서울경제신문  ‘近代化(근대화)에의 길’ 丙午 元旦 大統領 朴正熙 (병오 원단 대통령 박정희)”글귀가 적혀 있다.박정희 대통령이 1966년 1월 1일자 서울경제신문에 특별히 써준 휘호. “爲(위)서울경제신문 ‘近代化(근대화)에의 길’ 丙午 元旦 大統領 朴正熙 (병오 원단 대통령 박정희)”글귀가 적혀 있다.


정상을 향해 새로운 비상



2000년대 초반은 서울경제가 독자생존의 체제를 갖추기 위해 지나야 했던 가시밭길이자 새로운 비상을 위한 출발점이었다. 한국일보그룹의 경영난과 한국일보의 법정관리 및 분리라는 혼돈 속에서 2013년 12월 배달망을 개편했다. 이는 한국일보와의 결별을 의미했다. 독자적인 홈페이지도 구축했다. 2007년에는 ‘무협TV’를 인수해 서울경제TV SEN을 출범시켰다. 2010년에는 서울경제의 대표적 행사로 자리 잡은 ‘서울포럼’이 시작됐다. 이후 ‘금융전략포럼’ ‘대한민국미래컨퍼런스’ ‘한반도경제포럼’ ‘에너지전략포럼’ 등 각 분야의 인사들과 함께 토론하고 정책대안을 모색하기 위한 자리가 속속 만들어졌다.

디지털 시대에 맞춰 2017년에는 국내 최초의 블록체인 전문 미디어 ‘디센터(Decenter)’를 설립했다. 2018년에는 서울경제의 역사를 오롯이 간직한 서울 종로구 ‘중학동 14번지’로 11년 만에 돌아왔다. 그해 8월 프리미엄 컨버전스 미디어 ‘시그널(SIGNAL)’이 출범했고 올해 1월에는 4050세대 전문 온라인 미디어 ‘라이프점프’가 창간됐다. 특히 올해 6월부터는 ‘세상 어디에서든, 언제나 독자와 만나는 미디어’라는 슬로건으로 디지털 기반 종합 미디어 매체 전환을 추진하며 콘텐츠 생산과 유통체계, 인터넷 홈페이지를 전면 개편했다.

서울경제 복간사에서는 “앞으로 정치·경제적 이해집단에 의해 조종되는 일 없이 국민경제의 양심적인 파수꾼 노릇을 충실히 하고자 함을 여기서 엄숙히 다짐한다”고 강조했다. 희망의 100년을 보며 달려온 서울경제는 60주년을 맞은 지금 그 정신을 새기며 어떤 권력과 외압에도 흔들리지 않을 것을 다짐한다.


황정원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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