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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컴퓨터 달린 불도저’ 백상 장기영, 시대를 바꾸다[서울경제 창간60주년]

개인 신용대출 강조한 이론실무 겸비 금융인

1960년 국내 최초 경제지 서울경제 창간해

예리한 분석, 정확한 예측으로 대통령 신뢰얻어

경제부총리, 종로 국회의원 거치며 시대 이끌어

예술인 발굴 등 문화·스포츠가 자부심 원천

한 손에는 전화기를 쥐고 다른 한 손에는 서류를 든 채 신문을 보고 있는 백상 장기영 선생. /서울경제DB한 손에는 전화기를 쥐고 다른 한 손에는 서류를 든 채 신문을 보고 있는 백상 장기영 선생. /서울경제DB



“나의 뼈는 금융인이요, 몸은 체육인이며, 피는 언론인이다. 그리고 정치인은 나의 얼굴이다.”

쉴 새 없이 솟아나는 아이디어를 가졌다 하여 ‘일백 백(百)’ 자에 ‘생각 상(想)’ 자를 호로 쓴 백상 장기영(1916~1977) 선생이 생전에 그린 자아상이다. 은행원으로 시작해 한국은행의 토대를 다진 금융인이요, 서울경제와 한국일보를 창간한 언론인이며, 국제올림픽위원회(IOC) 위원을 지낸 체육인이면서 경제부총리와 국회의원을 역임했으니 그를 한마디로 정의하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컴퓨터 달린 불도저’라는 별명처럼 치밀함과 추진력을 겸비한 백상은 위기를 도약의 기회로 만들고 미답의 영역을 개척해낸 한국 현대사의 거목이자 시대의 선구자였다. 서울경제 창간 60주년을 맞아 되돌아보는 그의 발자취는 예측할 수 없는 불확실성과 미증유의 혼돈의 시대를 맞이하고 있는 우리에게 믿음직한 지표를 제시하기 충분하다.




금융인·언론인·체육인·정치인으로 살았던 백상 장기영. /서울경제DB금융인·언론인·체육인·정치인으로 살았던 백상 장기영. /서울경제DB


지난 1916년 5월2일 지금의 서울 용산구 한남동에 해당하는 경기도 고양군 한지동에서 태어난 장기영은 어린 시절부터 줄곧 1등을 도맡았다. 수재들만 입학할 수 있다는 선린상업학교에서도 최상위권에 올랐고 졸업하던 1934년에는 ‘우등 졸업자’로 일간신문에 이름과 사진이 함께 실렸다. 서울대 상대의 전신인 경성고등상업학교에 무시험 입학할 특전을 받았지만 어려워진 가정형편 탓에 진학의 뜻을 접은 그는 지금으로 치면 거대 다국적 기업인 조선은행에 입사해 청어잡이로 번성했던 청진점에서 스무 살의 첫 사회생활을 시작했다. 발군의 인재였다. 1943년 은행 내 공모에 제출한 ‘저축과 물가, 그리고 인플레’라는 제목의 논문은 당대의 경제학·사회학 이론에 케인스 이론을 접목해 큰 주목을 받았다. 백상은 이 논문으로 당대 엘리트들이 집결한 조선은행에서 1등 상을 거머쥐었다.

1934년 조선은행 청진지점에 근무하던 시절의 장기영(왼쪽에서 두번째)과 지점 행원들./서울경제DB1934년 조선은행 청진지점에 근무하던 시절의 장기영(왼쪽에서 두번째)과 지점 행원들./서울경제DB


이론에만 밝은 게 아니었다. 백상은 조선은행 최초의 ‘신용대출’을 밀어붙인 주인공이다. 태풍으로 배를 날린 선주가 필사적으로 돈을 구하러 다니는 것을 본 백상은 ‘폭풍우를 뚫고 배를 구하려 한밤중에 뛰어다니는 정신’을 높이 사 담보 없이 선뜻 대출을 권했다고 한다. 유례없는 신용대출을 받아 재기에 성공한 선주는 이후 남한에서 손꼽히는 재벌그룹을 이뤄냈다. 백상의 인재 중시와 사람을 보는 안목을 엿볼 수 있는 일화다. 조선은행에서 국가 중앙은행으로 승격된 한국은행으로 적을 옮겨 조사부에 근무하던 시절에는 6·25전쟁으로 굶주린 인사들을 위한 전시(戰時) 신용대출을 밀어붙였다. 반대가 많았으나 명문으로 펼치는 그의 논리를 거스를 사람은 없었다. 백상이 “피란 온 학자와 문인·예술가 등 저명인사들이 굶어 죽거나 가족을 지키지 못했다는 죄책감에 빠질 경우 전쟁에서 적을 물리쳐도 나라를 재건하는 비용과 시간이 몇 배나 들 것”이라며 강행한 지원 덕에 중요한 인재들은 본업을 중단하지 않고 전쟁통에서 살아남았다.

번뜩이는 아이디어와 혜안도 남달랐다. 일제강점기 말 패색이 짙어진 조선총독부의 화폐 남발로 인해 경제상황이 극도로 악화한 1946년, 백상은 서울신문 기고문을 통해 ‘일본이 통화를 남발한 부분을 대일 청구권에 포함시키되 일단 미국에 대신 받아 새로운 조선은행권 발행과 경제건설에 활용하면 초물가고를 잡고 경제를 성장시킬 수 있다’는 논리를 펼쳤다. 훗날 경제부총리로 재임하며 펼친 외자도입 활성화 정책은 이 아이디어를 발전시킨 것이다. 해방 직후인 1948년 7월 조사부 차장 신분으로 발간한 ‘조선경제 연보’는 오늘날 한국은행이 발간하는 국민소득통계·국제수지통계·금융통계·기업경영분석·산업연관표의 원조가 됐다. 금융계에 대한 백상의 가장 큰 업적은 한국은행법과 은행법 제정에 대한 기여다. 금융제도 현대화는 당시 이승만 대통령, 김도연 재무장관, 최순주 조선은행 총재가 합의한 사항이었다. 백상은 두 법안의 초안을 작성했고, 재무부를 설득하고 국회에 호소해 기민하게 법의 통과를 이끌었다.

다만 낭중지추라 공만큼 적도 많았다. 한국은행 설립 1년 후쯤 다른 사람의 잘못을 대신해 은행원으로서의 1막을 끝낸 그는 언론인으로서 인생의 2막을 열어젖혔다.

3115A07 장기영


언론인 장기영의 첫 행보는 재정난에 빠져 있던 조선일보로 향했다. 1952년 4월 조선일보 사장에 취임해 2년간 부수 13배 신장의 기록을 이뤄냈다. 이후 타의에 의해 신문사를 나서며 그는 젊은 조국에 걸맞은 새로운 언론의 필요성을 자각했다. 태양일보를 인수해 1954년 6월9일 창간한 한국일보는 뉴스의 가치에 의해 독자에게 인정받고 광고주에게서 광고 게재를 의뢰받는 상업지를 표방했기에 남달랐다. 사장실에 야전침대를 설치하고 철야로 신문제작을 독려한 백상의 일화는 유명하다. 매일 아침 논설실·편집국 합동회의를 주재했고 원탁회의부터 난상토론까지 기자들과 함께하는 시간을 아끼지 않았다. 그 자신도 문장가였다. 조사 ‘은·는’과 ‘이·가’가 어떻게 다른지를 기자들에게 설파했고 직접 사설도 썼다. ‘신문기자는 시인이 되어야 한다’는 말을 비롯해 ‘사건이 발생한 그 시간이 바로 마감시간이다’ ‘신문은 비판하는 용기가 있어야 하지만 칭찬하는 용기도 있어야 한다’ 등의 어록은 기자들이 나아가야 할 방향을 제시했다. 현장 취재의 중요성을 강조한 ‘발로 기사를 쓴다’는 표현도 그의 입에서 나왔다.

1960년 8월1일 창간한 서울경제는 13년 숙고의 결과물이었다. 1947년 초 장기영을 포함한 은행의 30대 젊은 실무책임자 8명이 결성한 ‘서울경제연구회’가 시발점이었다. 쟁쟁한 인력들이 매주 수요일마다 모여 새로 태어난 조국의 경제에 대해 토론했다. 경제신문이 필요하다는 데 뜻이 모였지만 여의치 않아 발간한 ‘경제평론’은 재계의 이목을 끌었다.


한국일보가 연착륙하자 재벌그룹 회장이 투자를 자처하며 경제신문 창간을 제의하기도 했지만 백상은 정중히 고사했다. 신중히 때를 기다렸고, 오랜 동지들인 서울경제연구회의 제안으로 제호 ‘서울경제’ 창간을 결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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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상의 통찰력은 서울경제 지면에서도 어김없이 빛을 발했다. 백상은 창간 일주일 뒤부터 서울경제에 ‘경제인 왕래’라는 고정란을 운영하도록 했다. 김포공항에 전담기자를 배치해 공항을 오가는 주요 인사들의 출국 일정, 해외 업무 계획을 간략하게 실었는데 해외 출장이 극히 드물던 시대에 누군가 외국행 비행기에 오른다면 그 자체로 중요한 경영정보가 될 수 있다는 그의 생각은 적중했다. 그는 길목과 핵심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드론 상용화 시대에 앞서 한국 언론에 항공기를 처음 도입한 것도 백상이었다. 항공부를 만들어 단발기와 쌍발기·헬리콥터를 잇따라 사들였고 다양한 항공사진을 실어 지면의 질을 끌어올렸다. 5·16 직후 신문제작용 종이가 부족할 때는 몸소 서울과 부산을 하루 두 번씩 왕복하며 신문용지를 실어날랐고 수해로 배달이 불가능해지면 항공기로 신문을 싣고 가 학교 등의 옥상에 뿌렸다.

백상은 쓴소리여도 바른 소리를 고집했다. 1961년 여름 칠레월드컵 출전을 앞두고 정부가 공산권인 유고슬라비아 선수단의 방한도, 우리 대표팀의 원정도 용납할 수 없다는 강경한 입장을 보이자 당시 대한축구협회장이던 장기영은 박정희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을 찾아갔다. ‘자칫 국제적으로 고립되는 결과를 초래할 수 있다’며 설득한 끝에 최종 예선전을 치를 수 있었다. 이때부터 박 대통령이 백상의 범상치 않음을 눈여겨보기 시작했다는 후문이다.

1962년 11월28일자 한국일보 1면 기사로 군부(혁명정부)의 심기를 건드려 사장 겸 편집국장인 장기영을 비롯한 4명이 구속되기도 했다. 자진 정간의 압박을 ‘3일 휴간’으로 버텨내면서 백상은 “한국일보를 3일 정간하는 대신 서울경제를 배달하라”고 감방에서 지시했다. 독자와의 약속이 중요했기 때문이다. 당시 책임자들은 자숙의 모양새를 취해야 한다는 판단에 이를 이행하지 않았고 9일 만에 출소한 백상은 불호령을 내렸다고 한다.

지난 1966년 11월 린든 존슨 미국 대통령 방한 당시 영접위원장으로 나선 장기영(가운데). /서울경제DB지난 1966년 11월 린든 존슨 미국 대통령 방한 당시 영접위원장으로 나선 장기영(가운데). /서울경제DB


이 같은 우여곡절에도 박 대통령은 경제이슈가 터질 때마다 “서울경제를 가져오라”고 했으니, 날카로운 분석과 정확한 예측에 대한 신뢰가 깊었다. 결정적으로 식량난이 극심하던 1963년 8월 세계적인 곡물 부족 사태 와중에 한국이 일본을 통해 캐나다산 밀가루 10만톤을 수입한 적이 있었는데 이를 막후에서 성사시킨 이가 백상이었다. 공식 외교채널로도 해결할 수 없던 곡물 수입을 백상이 일본 내 인맥을 총동원해 이뤄낸 것이다.

이듬해인 1964년 5월11일 백상은 박 대통령이 단행한 개각에 따라 부총리 겸 경제기획원 장관으로 입각했다. 좀체 측근에게 힘을 실어주지 않는 박 대통령이 경제 분야만큼은 전권을 일임했다. 경제난국 속에 등장한 장기영 부총리 겸 경제기획원 장관은 취임식에서 ‘물가를 때려잡고 저축을 늘릴 테니 6개월만 참고 기다려달라’고 했다. 그 약속대로 한국 경제는 백상이 경제부총리로 재임하던 기간 중 일찍이 경험하지 못했던 고속성장 가도에 들어섰다. 경제기획원은 백상이 서울경제신문·한국일보 발행인으로 복귀한 1967년 10월까지 최강 경제부처로서 한국 경제의 고속질주를 이끌었다.

문화·스포츠는 백상의 자부심의 원천이었다. 추상미술의 선구자 중 한 명이자 해방 후 프랑스 현지에서 이름을 떨친 첫 번째 한국화가인 거장 남관(1911~1990)을 국내에서 먼저 알아본 이가 바로 백상이었다. ‘천하장사 씨름대회’를 처음 개최한 이도 백상이다. 우리의 씨름이 일본의 스모에 뒤질 이유가 없다는 생각에서다. 프로야구의 초석도 다졌다. 1971년 첫 경기를 시작한 봉황대기 고교야구는 지방의 무명선수들을 서울운동장 마운드에서 주목받게 했고 재일동포 학생야구단의 모국 방문경기로도 이어졌다.

소설가 황석영에게는 ‘뚝심 있는 후원자’였다. 황 작가는 1974년 연재를 시작한 대하소설 ‘장길산’을 준비한다며 ‘자료 조사비’ 명목으로 백상에게서 ‘집 반 채값 정도’의 거금을 받아갔는데 보름 만에 술값으로 돈을 날렸다. 다시 찾아간 그에게 백상은 돈과 함께 단골 술집의 명함을 주며 “달아놓고 마시라”고 타일렀다. 꼬박 10년이 걸린 ‘장길산’의 완결을 보지 못한 채 백상은 타계했지만 연재소설은 유훈처럼 지속됐다. 시대를 앞서 간 페미니스트이기도 했는데 유엔이 정한 세계여성의 해인 1975년에는 공채로 여기자만 뽑았다.

백상과 함께 한국 경제는 승승장구했으나 유신 정부의 언론통제는 심각해졌다. 권력에 의해 쫓겨나는 기자들이 생겨났으나 서울경제와 한국일보만은 해직 기자가 없었다. 백상이 이들을 지켜냈기 때문이다. 정작 백상 자신의 건강은 챙기지 못했다. 남들의 네다섯 배나 열정적인 인생을 산 백상은 우리 나이 겨우 62세로 타계했다. 그가 좀 더 오래 살았더라면 한국의 경제·언론·정치·문화·스포츠는 또 다른 양상으로 발전했을지 모를 일이다.

조상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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